_______개 시 곡______

        만남의 자리, 나눔의 자리 "우리 사는 세상"입니다. 안녕하십니까, ____입니다.

        네, 설 기분도 다소 누그러들고 일상생활도 점차 정상 궤도에 들어서는가 싶습니다. 고향을 찾았던 직장인들도 이제부턴 맡은 바 사업에 몰두할 때인가 봅니다.

        네, 흥겹게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는 여러분의 심정이 즐겁기를 기원하면서 오늘 방송은 노래로 시작하겠습니다.

        "바야야", 이정희가 부릅니다.

                        ________노    래______

        오늘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동녕현 이현숙씨의 "나간은 싫었다", 길림성 연길시 박련희씨의 "사랑의 덫"등 생활수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먼저 동녕현 이현숙씨의 수기 "가난은 싫었다"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흑룡강 신문에 실린 김춘식 선생님의 "가난 속에도 행복은 있었다."라는 글을 신문이 보풀이 일 정도로 읽어보았다. 어릴 적 우리 집도 무척 가난했으니까. 그 선생님의 가난 속에는 행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가난이 죽을 만큼이나 싫었다. 아니 죽기보다도 더 싫었다고 해야  적합할 것 같다.

어릴적 가정의 한 기둥이 무너지고 엄마마저 그렇다할 수입이 없는지라 우리는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었다. 그중에서 제일하기 싫은 일이 가마니 짜는 일이였다. 어린 나이에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가마니가 그렇게 미웠다. 남들이 뛰어노는 고무줄도 놀고 공깃돌도 쥐어보지 못하고 학교 갔다 오는 외에 매일매일 가마니 짜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싫단 소리 한번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나 살아보겠다고 악을 쓰고 밤낮으로 가마니 짜는 어머니가 너무도 가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악을 쓰고 일했지만 지옥같은 가난을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명절 때면 우리는 사과 한 근도 사올 수가 없었다. 가난했기 때문이다. 다른 어머니들 같으면 무라도 썰어놓고 사과처럼 먹어보자며 애들을 얼렸으련만 나의 어머니는 그러지 않았다. 방문을 꽁꽁 잠궈놓고 안에서 뭘 하는지 나오지도 않았었다. 가난 때문에 애들한테 죄지은 마음을 달랬으리라...

초중을 마치고 나는 진학을 포기했다. 공부를 못해서가 아니었다. 반에서 항상 5등안에 들었고 특히 조선어문을 잘해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았던 내가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음식점복무원으로 일했다. 글이 짧다보니 병마개 따개를 가져오라는 것을 가지를 들고 가 사람을 웃기기도 해산물이 모래가 씹히냐고 물었는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앵무새처럼 사람의 말을 따라서 모래가 씹힌다고, 아주 씹힌다고주인의 욕도 수태 먹었었다. 모두가 저주스러운 가난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린 나이에도 살아보겠다고 악착스럽게 모지름을 썼다.     

고모가 대과교원을 하면서 편안히 살라고 자리를 마련하여주었는데 나는 마다하였다 .당시 대과교원의 월급이 166원이고 내가 음식점에서 달아다니면 300원을 벌수가 있었다. 당시의 나는 편안히 살 수없는 처지였던 것이다첫 달 월급으로 동생이 그렇게 부러워하던 여자용 자전거를 사주었다. 너무도 좋아서 자기 전까지 마루에 들여놓고 닦고 닦는 동생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 번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잘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음식점에서 4 남짓이 일하다가 결국은 고모님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교원으로 교단에 나섰다 하지만 돈벌이는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하여 아침 4시면 눈을 부비며 일어나 국수를 눌렀다. 그래야만 낮에 어머니가 팔수 있었던 것이다휴식일에는 밀가루를 들여와야 하는데 당시 19 꽃나이이었던 내가 외바퀴밀차를 밀고 합작사에 가서 실어왔다. 길에서 심술궂은 청년들이 "동생 밀차에 앉아 오빠가 밀어줄게."하면서 조롱할 때마다 나는 그따위 조롱쯤은 무시했다. 그런 걸 따지려면 잘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뜨거운 눈물이 차거운 나의 가슴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번은 친구들이 모인 장소에서 어느 친구가 일을 부탁했다.   "돈만 줘봐 어떤 일이라도 해줄 수 있어" 라고했다.  맹세하지만 나는 농담이었다. 그러나 친구는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 돈밖에 모르니!"

친구의 말에 나는 모닥불이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분하고 억울하고 원통해 한순간 뭐라 말 할 수 없었다.

"그래, 돈밖에 모른다. 하지만 2원 때문에 남들이 운동화를 신을 때 누런색 운동화를 신어 본적이 있어? 아끼겠다고 무릎이 나간 운동복을 기워 입어본적이 있어? 그리고 돈 벌겠다고 8리길을 걸어 남의 봇짐을 이고 온 적이 있어? 있어. 때문에 돈을 좋아해. 돈밖에 모르고..."

나는  친구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하며 국수 한 사발을 먹고서야 자리에서 나왔다. 후에 절친한 다른 친구가 그날 내가 문을 박차고 나갈 줄 알았는데 꽤나 버티더라며 웃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자손짐이고 오기고 전부 다 버리고 있었다. 그저 살겠다는 욕망 하나로 살았던 것이다.

그런 덕분으로 지금은 아주 살고 있다. 화려한 아파트에서 따끈 커피도 마이고 사과랑은 싫어서 먹지 않을 정도로 여유가 있다. 그러니 사색도 여유 공간이 있어 옛날일도 남의 일처럼 글로 쓸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가난은 싫다. 가난 속에 행복이 있다 해도 말이다.


        네, 이상은 "가난은 싫었다"는 표제로 감상한 동녕현 이현숙씨의 생활수기였습니다. 좋은 글 전해주신 이현숙씨 감사합니다.

                        _______노    래_______

        계속해 길림성 연길시 박련희씨의 수기 "사랑의 덫"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18살 때부터 23년동안 나는 줄곧 차를 모는 일을 해왔습니다. 현소재지에서 살던 나는 결혼 전에 벌써  2만3천 원 하는 해방패자동차를 갖추었고 살림집도 갖추었었습니다. 나는 연길시에 들어온 후 1991년부터 6년동안 개인택시를 몰다가  1997년 11월에 한국으로 나갔습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2년 8개월만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내 뒤를 이어 2001년도에 안해도 한국으로 갔는데 그때부터 우리 가정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안해는 떠나면서 나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마음이 변할지 몰라도 당신을 향한 내 마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예요. 내가 한국에 나가는 것은 순전히 가정을 위한 것이니 당신은 날 믿어줘요.”

   나도 순진한 내 안해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안해는 출국한 후 전화도 자주 오고 돈도 보냈습니다. 그러나 2년 후부터는 안해가 점차  변하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게 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한국에 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사촌누이를 통해 안해가 다른 남자와 동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안해가 사귀고 있는 남자는 사춘 누이의 친척인데 어느 한 술장소에서 그 남자가 나의 안해를 소개해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 나가서 힘들게 사는 여성들을 많이 보아왔던지라 나는 안해를 이해해주리라 마음먹고 한동안 모르쇠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한없이 슬펐습니다.

   그후 나는 자가용을 몰고 물건구입을 나갔다가 시장거리에서 내 고향으로 시집온 수정이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시장에서 화장품 매장을 차리고 있었는데 남편은 한국에 나가고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비록 인물은 안해보다 못했지만 애교도 많고 통도 큰 수정이가 나한테는 색다른 유혹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나의 사촌형님이 나에게 돈 5만원을 꾸어달라고 하자 나는 안해가 반대하는 것도 불구하고 돈을 꿔주었습니다. 안해는 앙앙불락하면서 설날까지 그 돈을 받아오지 않으면 이혼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결국 두 달을 쓰겠다던 돈이 지금까지도 한강에 돌 던진 겪이 되였습니다. 안해는 성난 김에 이혼을 제기했고 자존심이 상한 나도 이혼신고서에 도장을 찍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이혼할 당시 나는 이미 수정이와 죽자살자하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안해는 나에게 그녀와의 관계를 끊으라고 충고를 했지만 나는 귀등으로 흘렸습니다. 네가 바람을 피우는데 내가 뭐가 모자라서 가만있겠냐? 이렇게 맞바람과 자존심으로 우리 부부는 결국 헤어지게 되였습니다.

   얼마 후 수정이의 남편이 한달 휴가를 맡고 집으로 돌아오자 우리 셋은 그녀의 집에서 마주앉았습니다.

   “당신이 우리 안해와 애인사이가 맞는지 솔직히 말해주오.

   수정의 남편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돌아온 이상 더는 수정이와 만나는 일은 없을 거요.

   하지만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정이가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 난 짠돌이와 같은 당신과 더는 못살겠어요. 난 이 남자와 꼭 살 거예요.”

   일년 후 수정이는 끝내 남편과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는 수정이가 남편과 헤여진 것도 나와 살기 위한 것인 줄로 알았고 또 수정이가 나와 끝까지 살줄로  믿었으며 우리의 사랑을 굳게 믿었습니다.

   “자기야, 나 당신만을 사랑하는 거 알지? 나 당신과 결혼해서 백발이 될 때까지 살고 싶어... ”

   눈물범벅이 되여 나와 결혼하겠다는 녀자의 맹세를 나는 믿었습니다. 녀자의 눈물 앞에서 나도 뭔가 상대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고 그 믿음을 표현하고 싶었으며 혼신을 다해서 나의 사랑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당연히 녀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돈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는  40여만원짜리 통장을 서슴없이 그녀한테 맡겼습니다.

   하지만 수정이와의 뜨거운 사랑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안해와는 달리 그녀는 가정은 뒷전이고 늘 남자들과 술먹기에 바빴으며 자기 몸을  브랜드로 감고 다니면서 사치만 추구하는  녀자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툼이 잦았지만 결국 눈에 콩깎지가 낀 나는 그녀의 애교에 넘어가 번마다 양보하고 말았습니다. 수정이한테 빠진 나는 안해한테는 한번도 사주지 못한 고가의 선물들을 서슴없이 그녀한테 사주었지만 그녀는 나한테 양말 한컬레 사주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치정에 빠져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돈만 까먹었습니다. 우리는  마음껏 여행도 다니고 좋은걸 먹기도 하였으며 고급스러운 곳에서 소비하면서 질탕하게 3년을 보냈습니다.

   결국 40만원의 돈이 거덜이 나고 단물이 빠졌습니다. 그녀가 마지막 카드를 내밀었지만 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내가 사춘형님한테 빌려준 돈을 받으려고 상해로 떠나려고 준비하는데 수정이가  가게 하나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 순간까지도 수정이를 믿었던 나는 나의 마지막 재산인  13만원짜리 자가용을 팔아서 5만원을 내고 가게를 세맡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은 또 한 번 빗나갔습니다.

   내가  상해에서 돌아왔을 때 수정이는 가게를 남한테 양도하고 그 돈마저  챙겨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진 뒤였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자기를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수정이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이제 내가 당신보다 나은 남자는 만나지 못할 겁니다. 그동안 당신한테 감사한 일이 너무나 많지만 내가 당신 돈을 썼으니 이제 무슨 면목으로 당신과 만나겠어요? 미안하지만 우리 서로 각자의 길을 갑시다.

   나는 수정이를 찾아 몇 달 동안이나 헤맸지만 작심하고 숨어버린 수정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도, 돈도, 녀자도 다 잃은 나는 삶의 벼랑끝에 섰습니다. 절망과 배신감 그리고 수정이에 대한  분노로 나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타락에 빠져 세월을 보냈습니다. 나는 약을 먹고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반년동안 나는 마작에 빠져서 나머지 돈마자 다 날려버렸습니다.. 내마음속에는 오직 분노만 남았습니다.  수정이를 만난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 뿐입니다.

   그후 살아가기 위해서  2006년 5월부터 나는 한 식당에서 채소구입을 하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는 형님처럼 모시던 한 향진의 진장을 만났는데  그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자가용을 몰고 다니던 그때를 잊어버리고 인생을 다시 시작해보아라. 너는 할 수 있을 거다. 지금 너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모른다.

   나는 그의 말에서 힘을 얻었고 원래의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다시 일어섰고 부지런히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나는 빈털털이 신세지만 언젠가는 꼭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직 40대 초반인 나의 앞날은 멀고도 깁니다. 자신의 꿈을 버리지 않는 한 아름다운 미래는 꼭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고 싶습니다.


        네, 이상은 길림성 연길시 박련희씨가 전해온 생활수기 "사랑의 덫"이었습니다. 글 보내주신 박련희씨 감사합니다.

                        _______노      래______

        요즘 세월을 살아가노라면 이런 저런 유혹을 이겨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네, 길림성 연길시 맹영수씨의 수기 "나름대로 찾은 정답"을 감상해 보겠습니다.


        "삘리리"하고 핸드폰이 울린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녀의 음성이 내 귀전을 파고든다. 웬 일인지 손이 떨리고 심장 박동도 빨라진다. 세상에, 어쩜 이런 일이…복권이나 당첨된듯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이런 걸  두고 행운이라 할까? 아니면 호박이 넝쿨채로 떨어졌다고 할까?  그녀가 술잔을 나누잔다. 그것도 그녀의 집에서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보잔다.

     "글쎄요?...내일 다시 봅시다."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명확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체면 때문에 그리고 졸장부여서도 아니다. 도무지 믿을 수 가 없었다. 몇 번의 장소에서 언제 봐도 그렇듯 반듯한 그녀가 아니었던가.

     나는 그녀를 어느 한 생일파티에서 알게 되였다. 불혹을 넘겼으나 주름 한 오리 없는 그녀의 얼굴에는 하냥 맑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예쁘장했지만 요염하지 않았고 활발했지만 속됨이 없었다. 알고 보니 그녀도 책을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부족한 내 글을 거의 다 읽고 있었다. 전문작가가 아닌 초학자에 불과한 내 글을 그녀는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반가우면서도 충격이 컸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럼없이 말을 나눌 수 있었고 전화번호도 교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은 없었다. 우리 사이에는 가정이란 울타리가 장벽을 치고 있었다. 그녀도 나도 다 자기의 "반쪽"을 이국에 "수출"한 처지였다. 그만큼 우리는 이지라는 단속아래 누구도 그 방선을 허물 수 가 없었고 또 허물 담도 없었다. 칼칼한 남자의 카리스마란 별로 없이 바람만 불어도 날려갈듯 왜소한 내가 장미 같은 그녀에게 언감생심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으랴!

     나는 허물투성이는 아니더라도 버젖하게 뭔가를 자랑할 것도 없는 사람이다. 간혹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사촌 같은 글이나 쓸 줄 아는 초보 글쟁이일 뿐이다. 그래서  책을 좋아하고 글에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즐겁게 친구로 사귀고 있다. 사실 나는 그녀 외에도 몇몇 이성 문학친구들과도 스스럼없는 련계를 갖고 있다. 아무튼 나는 그녀를 이성보다는 부담 없이 관상할 수 있는 화분으로 느끼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흥분이 잦아지면서 차슴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내가 뭐 고상한 놈이라도 되는 걸까? 아니다. 사실 비린내를 싫어하는 고양이가 없다고 나도 아내를 보낸 후로 이성이 그립다. 하물며 애인 하나 없다면 바보취급 받는 요즘 세월임에랴!

     나는 은은한 달빛을 감지하면서 침대에 몸을 던졌다.

     가족이란 무엇이고 사랑이란 무엇일까? 윤리도덕이란 무엇일까? 끝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감돌면서 저도 모르게 스르르 깊은 상념에 빠져든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별이란 아픔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가족이 5대주4대양에 헤어져 살아가는 시대는 아마도 전대미문일 것이다. 그만큼 출국으로 해서 생겨난 이산은 전쟁으로 생겨난 이산보다 더 무섭고 아프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부득불 고독과 외로움이란 무서운 적과 8년 항전을 하듯 지구전을 벌려야 했다.

     외로운 사람을 만나면 달래주고 싶고 같이 고독을 나누고 싶은 것은 동변상련의 심정이다. 외로운 가슴끼리 사슴처럼 기대고 살면 어느 정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당당한 이유가 되여 여기 "후방"에 있는 "용사"들은 때론 "애인"이 되어주고 때로는 "임시가정"도 묶어가고 있다. 하긴 비상세월이라 오정육감을 지닌 속세의 인간들인 만큼 한번쯤 외도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왕왕 한번으로 시작되어 그 도를 넘어가는 게 아닌가. 결국 그렇게 되면 우리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비밀 하나를 십자가처럼 등에 지고 매사에 조심하면서 숨 가쁜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결국 언젠가는 가족의 해체를 불러오고 나아가서는 전반 민족의 이미지도 흐리게 될 것이다.

     언제부터 "애인"이란 허울 좋은 인연은 에이즈처럼 우리의 세포를 야금야금 녹여내고 있다. 세상을 경악케 한 "사천 문천 대지진" 같은 재난이 바야흐로 우리에게 덮쳐들고 있다. 건전한 신앙과 견정한 인생관이 없다면 자칫하면 그 재난에 휩쓸려 들어가고 만다. 사실 이 세상에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란 이 인연보다 더 완미하고 견고한 인연이 어디에 또 있을까?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내 남편, 내 안해, 내 자식이  세상 제일이 아니겠는가!

     기실 진정 외롭고 고독한 것은 "전방"에 있는 그들일 것이다. "후방"에 있는 우리들에겐 그래도 자식, 부모, 형제, 친구들이 있지만 그들에겐 고달픈 고역과 자기 그림자 외에 뭐가 있을까! 가족들과의 이른 상봉을 위해 문화, 생활 등 각종 차이로 빚어지는 스트레스를 묵묵히 감내하면서 소처럼 꾸벅꾸벅 몸만 내번지는 그들이 아닌가. 그만큼 외로움에 울고 그리움을 달랠 것은 우리먼저 그들이 아닐까!

     어찌보면 황당하고 가소로운 "후방"사람들인 것 같다. 하긴 어떤 사람들은 개방세월인데, 그리고 "애인"을 사귀는 것은 은은한 찻집에서 커피나 한잔 나누면서 힘들 때의 잠간의 어깨빌림이라고들 하지만 인간본능의 유혹을 물리치기란 말처럼 그렇게 쉬울 수  가 있을까?

     그러고 보면 옛날 우리 어머니 세대들에게 머리가 숙어진다. 그들은 남편을 전방으로 보낸 후 일각이 삼추같아도 그 절개를 지켜왔었다. 지어는 남편이 전사한 소식을 접수하고서도 어린 자식을 위해 단연히 수절을 해온 그들이였다. 물론 제창할 삶은 아니지만 하나의 별만 우러러 보면서 살아온 그 일편단심 앞에서 가슴에 손을 얹고 뭔가를 반성해볼 필요가 있잖을까!

     누군가 사회는 가정을 기반으로 한다고 했다. 불행한 가정이 많으면 사회는 멍들게 된다. 그만큼 외도에 빠지면 순수한 사랑을 운운 할 수 없고 정감세계도 기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이 자기의 생리욕구만 추구한다면 말 그대로 미물과 뭐가 다를까. 생활은 음악감상도 유희도 아니다. 이제는 그만 잠을 깨고 정신을 차릴 때가 되였다.

     이산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고독과 외로움과의 전투이다. 무지한 자는 싸움에서 절망을 느끼고 탈선을 하고 자멸을 하지만 현명한 자는 지혜롭게 인내를 키우면서 열심히 마음의 도를 닦는다.

     그렇다, 눈과 가슴으로 하는 사랑을 배우고 멀리 있어도 함께 하는 법을 배운다면 외딴섬의 한그루의 나무가 된들 뭐가 두려울 게 있으랴!

     "위대한 승리란 바로 자기와 싸워 이기는 것이다"라는 고리끼의 명언이 있다. 래일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 모두 자신에게 전쟁선언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동녘이 희붐히 밝아오고 있다. 불면의 밤을 보냈어도 드디어 나름대로의 답을 찾고나니 마음이 날아갈듯 가벼워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핸드폰을 잡아든다...

                        ________음    악_______

        좋은 이야기로, 좋은 글로 엮어지는 "우리 사는 세상",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획과 제작에 남석준, 진행에 ____었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