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조선민족 음악의 변천에 관한 소고-김창근


I. 서 론

  '연변'(延邊)이란 현재 중국에서 821,479명의 조선민족들이 살고 있는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약칭이다. 연변은 중국동북지방(흑룡강성·길림성·요녕성)인 길림성의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 면적은 42,700㎢로서 길림성 면적의 ¼, 홍콩면적의 40배에 해당한다. 지리적 위치를 보면 동쪽은 러시아 연해주 하싼지구와 인접되어 있고 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의 양강도, 함경북도와 나란히 잇대어 있다. 중국에서 살고 있는 조선민족은 약 1,920,579명으로서 전국 56개 민족 가운데 열 두 번째를 차지하며, 주로 동북3성인 흑룡강성(黑龍江省)·길림성(吉林省)·요녕성(遼寧省)에 분포되어 있다. 길림성에 1,183,567명, 요녕성에 230,719명, 내몽골자치구(內蒙古自治區)에 22,173명이 살고 있고 나머지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중국 조선민족은 조선으로부터 중국 동북지방에 건너온 이주민으로서 그 역사가 150여년이 된다. 중국 조선민족이 조선으로부터 중국 동북지방에 이주한 시기와 원인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중엽인 1860년부터 1869년 사이에 조선의 북부지방은 극심한 수재·한재 등 각종 재해로 하여 많은 조선 이재민들이 중국 동북지방에 건너오게 되었으며, 그후 1910년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되면서부터 중국 동북지방에로의 이주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하여 1910년부터 1920년까지 중국 동북지구에 조선민족 인구가 459,400여명이 되었고 10년 후인 1931년에는 63만명, 1940년에는 140만명, 1945년에는 2,163,115명이 되었으나, 해방 후 많은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현재 동북3성에 거주하는 조선민족들의 출신과 지역분포들을 보면 요녕성에는 인근의 평안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남쪽출신이 많이 살고, 흑룡강성과 길림성에는 함경도 출신과 조선의 남쪽 여러 지방출신들이 살고 있다. 고향을 떠나 타국 땅에로 이주해 와서 고생과 눈물로 살아왔던 조선민족은 오늘날 정확히 관철되고 있는 중국정부의 민족정책의 배려하에 민족의 전통 미덕을 학습·계승하고 발양하여 민족의 자존심(自尊心)·자신심(自信心)·자호감(自豪感)을 가지고 민족의 말과 글을 사랑하고 발전시키면서 56개 민족중의 일원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조선민족들은 예로부터 음악을 즐기는 민족이었으나 중국에 이주해 온 초기에는 그들만의 독창적인 음악이 없었고 다만 고국에서 부르던 민요나 유행가를 부를 뿐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노래들을 부르면서 살길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타국 땅에서 사는 서러운 마음을 달래었다. 그러나 1945년부터는 오늘의 음악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국 조선민족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인 연변에서 그 발전이 빨라 모든 중국 조선민족 음악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현재의 연변음악은 국내에서도 비교적 성망이 높으며 근대 중국음악사에 있어서도 그 어느 소수민족보다도 음악에 대한 공헌이 큰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연변음악'은 중국 연변에서 살고 있는 조선민족들이 조선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와 살아오면서 자기민족의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그것을 창조하고 발전시킨 음악이다. 연변음악이 오늘과 같은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된 데는 허세록(許瑞綠 1916- )·박우(朴佑 1920- )·정진옥(鄭鎭玉 1926-1981)· 김성민(金聲民 1924.-1998)·동희철(董希哲 1929- ) 등을 대표로 하는 많은 음악가들의 공헌이 크다.
  이 논문에서는 주로 중국 조선민족 음악의 중심지인 연변의 음악발전과 연변아동음악의 변천을 개항초기·항일전쟁시기·국내해방전쟁시기·건국후기·문화대혁명시기·개혁개방 이후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음악학자들이 연변음악에 대한 이론적 연구에 도움을 주고 연변음악이 세상에 알려지게 하려는데 있다.

              
              
Ⅱ.  연변 조선민족 음악

  1. 초기 연변음악의 발전(1920년대)
  1883년경부터 연변에서는 학교교육을 시작하였으나 {조선어문}(朝鮮語文)과 {천자문}, {사서오경}(四書五經)같은 봉건 윤리교육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근대문화가 들어옴과 동시에 조선민족들은 특히 민족의 문화를 높여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문화교육을 진행하게 되었다. 1906년에 조선의 애국자들이 동북에 와서 학교를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이상설(李相卨)과 같은 사람들이 용정(龍井)에 처음으로 신식학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웠다. 1899년부터 천주교는 여러 종교 가운데서도 가장 일찍 연변에 들어와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도 1903년을 전후로 연변에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천주교나 기독교 계열의 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는데 1899년부터 1914년 사이에 연변에 세워진 학교가 17개소나 되었다. 그러므로 연변의 교육에 천주교와 기독교의 공헌도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07년에 일본 통감부 간도파출소에 의하여 서전서숙이 없어졌다. 하지만 서전서숙이 폐교된 후에도 만주 각지에서 새로운 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간도에서도 조선인 학교가 계속 설립되기 시작하였는데, 1910년 간도에 설립된 조선인 학교는 72개였으며 1926년에는 191개로 늘어났다. 1920년 좌우에는 용정이 조선민족들이 많이 집거한 도시였고 문화의 중심지였다. 당시 많은 중학교들이 용정에 설립되었다. 그 당시는 중학교들도 조선민족의 주요한 문화진지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활동의 주요진지였으며 반일사상을 전파하는 주요진지였다. 1926년부터 조선의 서울·평양·일본에서 음악대학을 졸업한 음악가들이 연변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일본의 동양음악대학을 졸업한 윤극영(尹克榮 1903-1988), 도꾜의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문하연(文河淵 1909-1987), 1930년 서울 이화전문학교 피아노과를 졸업한 허홍순, 1940년초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한 황병덕(黃秉德), 1940년에 평양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박창해(朴昌海) 등 훌륭한 음악가들이 연변의 각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연변의 음악교육이 시작되었다. 윤극영은 1926년에 서울로부터 연변의 용정에 와서 동흥중학교·광명중학교·광명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외나무다리](윤석중 요), [고기잡이](윤극영 요), [제비남매](윤석중 요) 등 좋은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1935년부터 1939년까지 4년 동안 서울·일본에 가서 활동하다가 1940년에 흑룡강성 할빈(哈爾賓)에 와서 예술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침략으로 1년밖에 있지 못하고 용정에 다시 와서 활동하다가 1947년에 고향인 서울로 돌아갔다. 문하연은 1932년에 도꾜의 일본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연변 용정에 와서 대성중학교·연길간도사도학교·용정여자국민고등학교의 음악교원으로, 근화여자중학교 및 영신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 7월에 조선으로 나갔다. 그는 용정에 있으면서 대성중학교의 취주악대와 하모니카 합주단을 이끌었다. 허홍순은 명신여자고등학교 음악교원으로, 황병덕은 광명여자고등학교에서, 박창해는 은진중학교의 음악교원으로 있었다. 이들은 모두 연변 조선민족 음악교육발전에 기초를 닦아 놓았다.
        
  2. 중국의 항일전쟁시기의 연변음악(1931-1945년)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국의 동북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동북을 침략하였다. 하여 연변도 일본제국주의 손에 점령되었는데 그들은 조선민족의 문화예술마저도 말살하려고 우리민족의 언어와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1931년 9월 22일 중공중앙(中共中央)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일제와 투쟁할 것을 전국에 호소하자 연변의 조선민족들은 전 동북지구의 여러 민족들과 함께 일제 침략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영용한 투쟁을 하였다. 1932년 봄에 백두산 항일혁명 근거지가 건립되면서 항일가요가 창작되어 널리 불리웠다. [유격대 행진곡], [의회 주권가], [총동원가]와 같은 항일노래들은 힘있고 전투성이 강했다. 그리고 [어린이 노래], [아동단가], [어린 동무 노래부르자], [고드름](윤극영 요), [수레](홍난파 작곡), [소년군가] 등 아동가요들도 항일전쟁시기에 많이 보급되었던 노래들이었다. 그 당시는 작곡가들이 없었으므로 다른 노래의 곡에 항일투쟁의 내용을 담은 가사를 붙여 불렀던 항일가요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부녀해방가]는 윤극영이 작곡한 [고드름]에 새 가사를 붙여 불렀고, [아동단가]는 홍난파가 작곡한 [수레]에, 계몽가요 [소년야구가]를 약간 개변시키고 새 가사를 붙여서 [결사전가], [소년군가]로 만들어 불렀다. 1930년대에는 연변에 전문예술단체가 없었으나, 1943년부터 허세록이 조직 지도한 간도방송국 방송악단과 연길시 협화청년악대는  유럽의 악곡, 조선민요 등을 많이 연주하였고, 이록당 작사, 허세록의 작곡으로 된 [향수의 노래](1943) 등 창작가요들이 많이 연주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연변의 음악활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3. 중국 국내해방전쟁시기의 연변음악(1945년-1949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투항하자 일제의 철제밑에 짓밟혔던 연변의 조선민족들은 전 동북지구의 조선민족들과 함께 항일전쟁의 승리로 인하여 더 없는 기쁨으로 들끓었으며 한달 후인 9월 하순에는 중공 동북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중공 연변위원회가 성립되어  연변의 모든 사업을 영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조선민족들이 많이 집거해 사는 연변, 흑룡강성의 목단강시, 요녕성의 홍경현 등 시에서 조선족 문예일군들이 조직되기 시작하였고 연변에서도 음악부가 포함된 간도예문협회·동라문인동맹·중소한문화(中蕭韓文化)협회·용정연예대(演藝隊)·도문예술동맹 등이 설립되었다. 1945년 가을 중국의 관내(만리장성 이남)에 있던 조선의용군은 동북에 왔는데, 1지대 는 요녕성, 3지대는 흑룡강성, 7지대는 길림성의 북부지구에 널렸고 5지대는 연변에 오게 되었으며 지대마다 문예선전대(文藝宣傳隊)가 있었다. 1946년 6월에 장개석(將介石)은 '정전협정'(停戰協定)을 어기고 전면적인 내전을 발동하였다. 연변의 조선민족들과 전 동북지구의 조선민족들은 다른 형제민족들과 함께 '자위전쟁으로 장개석의 진공을 분쇄하라'고 한 중앙의 호소 하에 전 동북과 전 중국을 해방하기 위한 영용한 투쟁을 벌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 1지대·3지대·7지대의 선전대의 음악작품을 보면 모두가 전쟁을 주제로 한 창작품들이었다. 1지대는 관현악 [승리](정진옥 작곡), [지뢰폭파수 조상두](주흥성 작사·정진옥 작곡) 등 작품들이 창작공연되었고, 3지대에서 가곡 [싸움터로 나가자](장해심 작사·백고산 작곡), [혁명항전](장해심 작사·박의환 작곡) 등 작품들이 창작 공연되었으며, 7지대에서는 가곡 [무산대중의 봄이 왔네](유광준 작곡), [송화강 5백리](정길운 작사·박××작곡) 등 작품들이 창작공연되었다. 7지대는 얼마 안되어 연변에 나와서 5지대 선전대와 합병하였으므로 작품이 1지대·3지대에 비하여 많지 않았다. 5지대 선전대는 연변에서 선후로 길동 보안군(保安軍)정치부 문공단, 길동 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대, 길림 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 길동 군분구 정치부 선전대로 바뀌다가 1948년 1월, 후방을 넘어서 길림성 사무청 소속 문공단으로 되었고 그해 3월에는 연변 전원공서 문공단(연변문공단)으로 되었다. 이 변화과정에서 7지대 선전대, 3지대 선전대, 목단강 조선인 문공단의 조선민족 문예단체의 예술인들이 연변에 나오게 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전후에는 전 동북지구의 조선민족 문예 골간들이 연변의 수부인 연길(延吉)에 집중되면서 연변의 음악발전은 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해방직후에 연변에서는 가극도 창작공연되기 시작하였는데, 훈춘에서는 아마추어 극단이 조직되어 가극 [나의 고향](김원수 작곡), [백설홍] 등이 창작공연되었다. 연길의 이스크라극단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설을 가지고 창작한 가극 [에밀레종](조두남 1912-1984)이 창작 공연되었으며 길동 군분구 정치부 선전대는 가극 [인민은 무장하였다](신활 대본·유광준 작곡)가 공연되었다. 하여 이 시기의 가극은 오늘날의 연변의 가극발전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 또 이 시기에 연변의 각지에서는 [우리는 민주 청년](임원갑 작사·허세록 작곡), [여성행진곡](현남극 작사·동희철 작곡), [베짜기 노래](채택룡 작사·허세록 작곡) 등 많은 가곡들이 창작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해방직후에는 취주악이 전면적으로 범위가 크게 발전·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각 중학교마다 취주악대가 있었다. 그 시기 허세록이 연변의 취주악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그가 작곡한 [축첩행진곡], [승리행진곡], [해방군행진곡], 나혜주 작곡으로 된 [진군] 등 취주악곡들이 많이 연주되었다. 1948년에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 전신)은 취주악대를 관현악대로 바꾸고 허세록이 작곡한 [연변은 좋은 곳], [해란강], [눈이 내린다]와 고자성이 작곡한 [생산] 등 관현악곡을 연주하면서부터 연변의 음악사에서 관현악이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국내 해방전쟁시기에 연변에는 음악창작과 음악활동에 골간(骨干)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그 중에서도 허세록은 가곡·취주악곡·관현악곡 등 창작에서 대중들이 즐기는 많은 작품을 썼으며 간도예문협회·동라문인동맹·중소한문화협회 등 문예조직의 음악부장, 연변문공단의 음악교원과 지휘자로서 연변 조선민족 음악의 창시자적 역할을 하였다.

  4.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의 연변음악(1949년-1949)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이 북경(北京)의 천안문 성루에서 전 세계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그때로부터 연변 조선민족들과 전 동북지구의 조선민족들은 중국 56개 민족의 일원으로 인정되었다. 그 시기 우리의 작곡가들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경축의 노래](차창준 작사·김성민 작곡), [고향산 기슭에서](김경석 작사·동희철 작곡), [고향생각](김인준 작사·허세록 작곡) 등 고향을 노래하는 수많은 노래들이 창작되었고 우리 민족이 중국 땅에 와서 개척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영용하게 싸워 이긴 민족의 역사를 표현한 대합창 [장백의 노래](김철 작사·정진옥 작곡)와 1953년에 창작된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표현한 독창곡 [처녀의 노래](최정연 작사·정진옥 작곡)는 1957년 8월에 구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 청년 연환절에서 창작부문 은메달을 받았다. 1950년 중기로부터 연변의 각 현에 문공단이 성립되기 시작하였고 1957년 10월 5일에 연변예술학교가 설립되어 전국의 조선민족 예술인재를 양성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연변예술학교에서 양성한 학생들이 연변가무단을 비롯한 주내 예술단체에 가서 활약하였고 또 중앙음악학원·평양음악대학 등에 가서 많은 인재들이 양성되기 시작하였다. 1957년과 1958년의 '반우파투쟁'은 허세록·김성민을 비롯한 재능있는 음악가들을 억울하게 '우파분자'라는 모자를 쓰게 하였고 이들이 쓴 작품도 작곡가와 함께 반동노래가 되어 부를 수 없게 되었으며, 연변의 음악가들은 많은 고난을 겪었다. 1950년대 후반기부터 연변에는 가극 창작도 적극 진행되었는데, [백나물 골](김광출 대본, 정진옥·박우 작곡), [한자루의 총](김광출 대본·정진옥 작곡) 등 대표적인 가극작품들이 공연되었다. 교향곡 [태양이 솟는다](허원식 작곡), 관현악 [항일의 봉화](최삼명 작곡), 바이올린 협주곡 [나의 고향](허원식 작곡)과 같은 기악작품들이 적잖게 창작·연주되었다. 1950년대 후기로부터 우리 민족전통음악의 발전도 비약적이었다. 여기에는 남도소리에 특기있는 박정열·이금덕, 남도소리와 서도소리를 겸한 신옥화, 서도소리에 특기있는 김문자·조종수·우제상 등이 우리민족 전통 음악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뿐만 아니라 1961년에 연변 민간예술수집조가 설립되면서부터 우리 민요의 수집·정리에 김성민·고자성·이황훈·김원창 등이 심혈을 많이 기울였다. 1960년대 중기에 이르러 연변음악은 음악의 모든 장르가 다양하였고 음악창작가들도 연변가무단·연변예술학교를 제외하고도 각 현·시에서도 많은 창작가들이 음악창작과 공연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므로 연변의 음악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다.

  5. 문화대혁명시기(1966년-1976년)와 개혁개방시기(1978- )의 연변음악
  1966년 6월 4일,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예술을 재난에로 빠져 들어가게한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하여 연변의 많은 음악작품과 허세록·정진옥·김성민을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이 시대의 버림을 받게 되었고 '투쟁'대상이 되고 말았다. 연변음악에 있어서 50년대와 60년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작곡가 정진옥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북한에 나감으로써 연변은 훌륭한 음악인재를 잃게 되었다. 노래도 수령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은 내용이어야 하였으며 그 누가 자기민족의 민요를 부르거나 민족음악을 창작·연구한다면 그것은 민족주의 반동사상이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조선족 여성들이 한복을 입어도 민족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4인무리'(강청·왕홍문·장춘교·요문원)가 문예독재주의로 세력을 떨치던 때는 한족 경극인 [본보기극]의 편단과 '모주석의 어록노래'만 부르도록 하였으므로 어느 작곡가나 성악가들이 자기의 고향을 그리는 노래나 민족풍으로 된 노래, 청춘남녀들의 사랑을 표현한 노래들을 창작하거나 부를 수가 없었다. 1976년 10월, 10년 동안이나 중국인민의 머리를 짓누르던 4인무리가 타도되었고 1979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는 문화대혁명을 잘못된 정치운동으로 시정하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억울한 누명을 썼던 모든 것을 해명하였으며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한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 즉 개혁개방을 하기로 결정지었다. 새봄을 맞은 연변의 많은 작곡가들은 창작에서 자유를 얻게 되자 자기가 쓰고 싶은 곡을 마음대로 쓰게 되었는데 80년대에 들어와서 [청춘원무곡](최현 작사·최연숙 곡), [오래오래 않으세요](허동철 작사·방룡철 작곡), [내 고향 오솔길](황상박 작사·최삼명 작곡), [어머니](이철용 작사·안국민 작곡), [산간의 봄은 좋아](최연 작사·김성민 작곡) 등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발표되었다. 1978년 11월에 연변방송국 예술단이 성립되었고 1981년 연길시 조선족예술단이 창립됨으로써 조선민족 음악그룹이 더 크게 발전하였다. 1987년말 연변가무단에서 조선민족의 민간전설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한 가극 [아리랑](김경련·김철학 대본, 안국민·최삼명·최창규·허원식 작곡)을 창작공연하였는데 1991년에 중앙문화부로부터 중국예술의 최고상인 <문화상>을 수여했다. 1948년부터 연변인민출판사와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지금까지 160여종의 노래집을 출판하였는데 개인작곡집으로는 동희철 작곡집 {고향산 기슭에서}(1978년 11월, 연변인민 출판사), 최삼명 작곡집 {내 고향 오솔길}(1982년, 연변인민출판사), {김덕균 작곡집}(1990년 2월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등 20여종을 출판하였고 {가요창작 기초지식}(초산·김덕균저, 연변교육출판사, 1975년), {음악기초지식}(초산·김덕균저, 연변교육출판사, 1976년), {악식과 분석}(초산저, 연변인민 출판사, 1982년), {음악사전}(김덕균 주필,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3년) 등 많은 음악이론서도 출판되었다. 1955년 7월 18일, <연변문련 음악분과위원회>(주임 허세록)가 설립되었다가 1959년 3월 12일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선후로 정진옥·김진·안국민이 주석으로 있었음)로 발전되었으며, 1989년 4월 17일에는 <중국 조선민족 음악연구회>(회장에 최순덕)가 성립되었다. 지금 중국음악가협회 총회 회원에 조선민족 회원이 전국적으로 80여명이 있고 연변분회에 350여명이 있는데, 이들은 조선민족 음악발전에서 주요 골간역할을 하고 있다. 연변음악은 해방 후부터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유감스러운 것은 민족기악음악 발전이 아직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이론방면의 연구가 잘 되어가지 못하고 있다. 민족기악곡을 쓰려고 하는 사람도 적지만 또 있다해도 아직 대중들의 감상수준이 따라가지 못하고 특히는 경제기초가 박약한 원인으로 연변의 민족기악음악은 활발하게 발전되지 못하고 있다. 음악이론방면의 연구가 잘 되지 못하는 주원인은 이론방면의 연구를 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기 때문이다. 지금 연변에서 이론방면의 연구는 최순덕(崔順德, 1932- )·김덕균(金德均 1937- )·김남호(金南浩 1934)·정준갑(鄭俊甲 1941-1995)·남희철(南熙哲 1958- ) 등 몇 사람에 한정되어 있는 형편이다.


Ⅲ. 연변 조선민족 아동음악

  연변 아동음악은 우리 겨레가 한 세기 반을 연변땅에 살면서 다른 예술분야와 함께 발전시켜 온 음악이다. 1900년대부터 조선민족이 사는 곳에는 <서전서숙>을 비롯한 조선민족사립학교와 후에 일제가 운영한 조선민족중소학교, 종교계통에서 모두 음악과와 미술과가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음악교육이 앞자리를 차지하였다. 우리 겨레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와 살면서부터 1945년의 해방 전까지는 연변 아동음악은 자기의 독특한 음악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고 근근히 전래 아동가요를 부르는 데에 그쳤으며, 1910년대 사립학교들이 창립된 초기에는 주로 계몽교육을 내용으로 한 작품들이 사용되었다. 학교마다 교가들을 창작하여 민족의식을 제고시켰으며 [학도가], [권학가] 등의 노래들을 교육하였다. 여기서는 연변 아동음악이 우리 조선민족의 다른 예술과 함께 파란곡절을 겪으며 오늘날의 연변 아동음악으로 발전해 온 역사를 간추려서 발전초기·항일전쟁시기와 국내해방전쟁시기·건국후 문화대혁명시기·개혁개방 이후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연변 아동음악의 발전초기
  우리 겨레가 중국에서 살던 초기에는 자체의 동요가 없었으므로 조선의 전래동요를 불렀다. 19세기 말에는 계몽가요와 외국노래에 조선말 가사를 넣은 노래들이 유행됨에 따라 [권학가], [학도가], [동심가], [망국가] 등의 노래들이 널리 불려졌다. 연변 아동음악이 오늘날의 연변 아동음악으로 발전되어온 역사를 보면 50여년밖에 안된다. 즉 1945년에 연변이 해방되면서부터 연변 아동음악이 지속적으로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1924년 10월 아동음악가들인 윤극영이 작사·작곡한 [반달], [고드름](유지영작사·윤극영 작곡), [고향의 봄](이원수 작사·홍난파 작곡), [오빠생각](최순애 작사·박태준 작곡) 등 많은 아동가요들이 연변을 비롯한 전 동북지구의 조선민족 어린이들 속에서 널리 불리웠다. 용정(龍井)은 중국 조선민족의 문화중심지였으므로 [용정은 문화도시]라는 노래까지 있었다. 당시 용정에는 여러 개의 중학교가 있었으며 학교마다 음악전문교육을 받은 음악교원들이 교편을 잡았다. 1926년 윤극영이 연변의 용정에 왔다. 그는 연변의 용정에 온 후 동흥중학교·광명중학교·광명여고 등 여러 학교의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제비남매], [고기잡이], [새매], [외나무다리], [우산셋이 나란히] 등 아동가요를 작곡하여 {윤극영 동요 100곡집}(등사본)을 출판하였다. 윤극영은 연변에 있는 동안 아동음악 창작과 음악교육의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그는 1947년에 고향인 서울로 돌아갔다. 문하연은 1932년에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용정에 온 후 대성중학교·연길간도사도학교·용정여자국민고등학교의 음악교원으로 있었으며 해방초기에는 용정의 근화여자중학교, 영신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에 조선으로 나갔다. 윤극영·문하연 외에도 명신여자고등학교의 허흥순(이화전문학교 졸업)·김선문(명신여자고등학교 교원, 숭실전문학교 졸업)·황병덕(광명여고 교원, 일본음악학교 졸업)·박창해(음진중학교 교원, 연희전문학교 졸업) 등 재능있는 음악교육가들도 우리민족의 음악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1932년부터 날로 심해진 일제의 잔혹한 압제로 하여 아동음악은 발전을 가지지 못하였으며 1940년대 초기는 일제의 잔혹한 탄압으로 인하여 조선민족학교들에서는 한글과 말을 사용하지 못하였고 노래도 민족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일본노래만 불러야 했다.

  2. 중국의 항일전쟁시기와 국내해방전쟁시기의 연변 아동음악
  일제가 획책하고 일으킨 1931년 9.18사변으로부터 동북은 일제의 식민지로 완전히 강점되었고 따라서 연변에서의 본격적인 문화침투가 시작되었다하여 민족언어문자 사용이 금지당하였고 노래도 민족의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기의 민족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남몰래 자기민족의 노래를 불렀고 민족의 동요를 어린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연변의 여러 개 항일 근거지와 각 학교들에서 항일가요 [삐오넬가], [어린동무 노래부르자], [나가자 싸우자], [소년단의 노래], [결사전가] 등이 많이 보급되고 불리웠는데 어린이들에게 반일선전을 하고 인민들에게 항일투쟁의 열의를 불러일으키고 항일전사들을 고무·격려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자들이 투항하자 일제의 탄압과 압박을 받았던 연변 조선민족들은 다른 형제민족들과 함께 항일전쟁 승리로 하여 더없이 기뻤다. 1945년 8월 15일 연변이 해방된 후 어린이의 노래가 창작되어 나오기 전에 연변의 어린이들을 비롯한 동북 각 지방의 조선민족 어린이들에게는 항일시기에 불렸던 [어린동무 노래부르자], [삐오넬가], [두만강](이록당 작사·허세록 작곡) 등 노래들뿐이었다. 그 당시 [흘러라 물](이록당 작사·허세록 작곡), [의용군 아저씨](서영화 작사·작곡), [해저문 마을](윤해영 작사·김종화 작곡) 등 몇 수의 아동가요가 창작·보급되었다. 1948년 연변문공단(연변가무단)에서 조직하고 편집한 {대중가요집}을 연변교육출판사에서 출판하였는데, 그중에는 아동가요 [아동단 행진곡](현남극 작사·박우 작곡), [우리집 황소], [학교가는 길] 등 10수가 실렸다. 이때로부터 연변 아동가요 창작과 출판이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3. 중화인민공화국 성립후의 연변 아동음악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1966년의 문화대혁명 전까지 16년간 연변의 아동음악은 지속적인 발전을 하였는데 아동음악 창작그룹·음악교육그룹이 크게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1950년 {교육통신}잡지에는 최형동 작사·박우 작곡의 [대기따라 나가자]가 발표되었고 1951년 10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동요곡집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에 [고개길](김례삼 작사·허세록 작곡), [검둥이와 돼지](김례삼 작사·박우 작곡), [병아리](채택룡 작사·허세록 작곡) 등 30여수의 동요가 실렸다. 1952년 연변 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된 후 연변 아동음악 발전은 더욱 활발해졌다. 1954년에 {동요곡집}과 {유치원 노래집}이 출판되었는데 [우리 학교](소학교 조선어문 교과서, 허세록 작곡), [야영의 밤](최형동 작사·이인희 작곡), [기차놀이](김례삼 작사·권정숙 작곡) 등 어린이들의 생활을 반영한 좋은 노래들이 실렸다. 1957년 중국의 '반우파' 정치운동에서 시인 채택룡·김인준·조룡남, 작곡가 허세록·유영섭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비판을 받게 되었고 창작의 권리마저 박탈당하여 그 당시의 연변 아동음악 발전은 일정한 손실을 보았다. 1957년 10월 5일 연변예술학교가 설립되어 조선민족 예술인재를 양성하게 되었고 1957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 소년아동조가 증설되어 아동음악 보급은 더욱 큰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총적으로 연변의 아동음악은 19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으로부터 1966년의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출판·방송·음악교육 등 방면에 전면적인 발전을 하였으며 아동음악 창작 그룹도 방대하여 아동음악 창작이 양적으로도 많았지만 작품의 내용상에서 전래 아동가요의 틀을 벗어나기 시작하였고 작품의 예술성도 높아졌으며 어린이들의 동심세계를 잘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의 정서도 맑고 아름다우며 명랑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4. 문화대혁명 시기의 연변 아동음악
  1966년 5월부터 1976년 9월까지의 문화대혁명은 당과 국가 및 전국 각 민족 인민들에게 막대한 재난을 들씌운 내란이었다. 그것은 1년도 아니고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으니 나라는 엉망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연변 아동음악도 문화대혁명의 피해를 모면할 수가 없었다. 1966년 6월부터 1971년까지 아동가요 창작이 중단되어 어린이들은 한문으로 된 [어록가요]나 [본보기극](京劇)을 불러야 했고 연변예술학교가 문이 닫히고 연변인민방송극 아동프로가 취소되고 연변소년보·연변인민출판사 음악편집부가 폐간, 해산되었다. 이 시기의 아동가요는 [어록가요]나 '극좌'적인 본보기극의 영향으로 그 대부분이 '혁명성'과 '투쟁성'의 성격으로만 되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심리에 맞지 않으며 어린이들의 천진난만성을 성인화하였으므로 어린이들의 심신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1972년에 연변예술학교가 수업을 회복하고 연변인민방송국 아동프로, 연변인민출판사 음악편집부의 회복과 함께 음악교육과 아동음악 창작이 많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4인무리'의 좌적노선의 영향으로 하여 많은 제한을 받았다.

  5. 개혁·개방 이후의 연변 아동음악
  1976년 10월, 4인무리가 타도되자 연변의 아동음악도 새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1976년말부터 '좌'적인 정치노선의 속박에서 벗어난 아동음악 창작가들은 2년 사이에 무려 200여수나 되는 아동가요를 창작하였다. [우리는 과학을 사랑하지요](김경석 작사·정준갑 작곡), [우리마을 보배산](김별 작사·김남호 작곡), [붉은 꽃송이](김예 작사·김광 작곡)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979년 12월 중국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3中全會)의 이후 문화대혁명이 오류적인 정치운동으로 청산되었고 당의 개혁·개방정책이 관철·집행되어 경제를 중심으로 한 4가지 현대화 건설(농업·공업·국방·과학기술)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로부터 연변 아동음악은 완전히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허세록을 중심으로 한박우·김성민·김종화(金種華 1932- ) 등이 제1대 아동음악 창작가라고 한다면 제2대 아동음악 창작가들로는 김덕균(1937- )을 중심으로 한 김민수(金玟洙 1933.10.2)·김남호·유영섭(柳永燮 1934-1997) 등이 있다. 특히 제2대에서 김덕균이 아동음악 창작발전에 공헌이 크다. 그러므로 연변 아동음악과 모든 중국 조선민족의 아동음악 창작에서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제1대의 허세록과 제2대의 김덕균이다. 1945년부터 1994년까지 50년 사이에 전국적으로 아동가요가 3천5백여 수가 발표되었는데 그 중에서 대부분이 연변에서 창작된 작품들이 많다. 8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지금까지 연변의 유치원·소학교·중학교의 음악교육은 더욱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연변 제1사범학교와 연길시 기공(技工)학교에서 유아사범반을 모집하여 음악도 가르침으로써 이들이 연변각지의 유치원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에서는 음악교육학부를 설치하여 양성한 많은 졸업생들이 주내 각지의 소학교·중학교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0년부터 동북 조선민족교육출판사(원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중학교·소학교·유치원·사범학교 등 음악교과서가 출판되어 체계적인 음악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1985년 7월 13일에 전국 조선문교재 심사위원회 음악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 음악교과서를 심사, 수개하고 있다. 1981년 12월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에 아동음악학회가 설립되었고 1985년 1월 22일 연변소년아동예술일군협회와 1988년 8월 연변아동음악학회가 설립되었다.
  1990년 7월16일 중국 조선민족아동음악학회가 설립되어 연변과 전국의 조선민족 아동음악사업이 크게 추진되고 있다. 연변 아동음악이 걸어온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부족한 점도 적지 않다. 중소학교에서의 음악수업이 교육부에서 제정한 교수요강의 요구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데 소학교보다 중학교가 더 심각하다. 음악창작에서도 소학교는 비교적 좋은 편이지만 중학생들이 부를 노래에 있어서 창작이 못따라가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리고 아직도 음악교원이 다른 과목의 교원보다 훨씬 부족한 것이 문제로 된다. 이는 앞으로 관계부문이나 전체 음악교육일군들이 합심하여 부족한 점을 하루속히 개진하여 연변 아동음악 발전의 더욱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연변 아동음악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Ⅳ. 결 론

  연변 조선민족 음악은 항일전쟁시기, 국내 해방전쟁시기, 반우파 투쟁운동, 문화대혁명 등 어려운 시련을 겪어오면서 오늘날의 음악으로 발전되어 왔는데 그 역사는 50여 년밖에 안된다. 또 이 50여년 동안 연변음악이 오늘날의 음악으로 발전되어 온 데는 허세록(許瑞錄)·박우(朴佑)·정진옥(鄭鎭玉)·김성민(金聲玟)·동희철(董希哲) 등을 중심으로 한 음악가들과 음악애호가들의 노력이 스며 있다. 1916년 음력 9월 8일에 구 소련 연해주 니꼴쓰크우쑤르키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서 1930년 겨울에 부모님을 따라 중국 용정으로 건너온 허세록(본명 허두종)은 1945년부터 연변 음악활동에 적극 뛰어들어 연변 음악발전을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허세록은 연변 조선민족음악사에서 연변음악의 창시자, 연변아동음악의 창시자, 걸출한 작곡가, 음악활동가, 음악계몽가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그는 많은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는데 관현악 4수, 취주악곡 20여수, 가극 3부, 무극 1부, 기악독주곡 5수, 성악곡 150여수, 아동가요 100여수를 각각 창작하였다. 허세록의 계몽교육을 받고 음악가로 성장한 가야금연주가 김진(金鎭), 작곡가 동희철·김성민·최삼명(崔三明) 등, 1952년에 연변사범학교 음악교원으로 근무할 때 그의 계몽교육을 받고 음악가가 된 작곡가 허원식(許元植)·임영호(任泳浩)·김남호, 음악교육가 최광준(崔光俊), 아동음악작곡가·음악교육가·음악이론가 김덕균, 아동음악작곡가·음악교육가 유영섭·김민수 등은 연변음악의 발전을 위하여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다. 바로 이러한 음악가들과 음악애호가들, 그리고 연변 조선족자치주 정부의 도움이 있었기에 연변음악이 오늘의 음악으로 발전되어 왔다.
  연변 조선민족음악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고 연변 조선족자치주가 창립되면서부터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으며 앞으로 중국특색이 있는 조선민족음악으로 창조하여 여러 민족음악과 함께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