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세상 사람들은 공기를 마시고 살지만 선생은 연변대학, 연변조선족을 호흡하며 사는구나…》 이는 한국의 중국통 동훈선생이 박문일교수의 80세 생일에 보내온 축사의 한 구절이piaowenyi.JPG 다.

    외유내강형의 평생교수로 불리는 박문일교수는 연변대학의 전임교장으로 중국의 저명한 교육가이고 력사학가이며 사회활동가이다.

    1932년 8월 15일에 길림성 연길현 룡정촌 영국덕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3형제중 막내로 태여난 박문일은 어린 시절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많은 고생을 하였다. 북만땅에 돈벌러 간 아버지는 오래동안 소식이 없었고 어려서부터 형님들과 함께 생활하여야 하였다.

    둘째 형이 화룡현 팔가자철공소에 가서 일하게 되여 팔가자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그는 형님들의 권고로 10리밖의 서성소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나어린 박문일은 어렵게 이루어진 학습기회를 소중하게 여겼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는데 서법, 미술을 포함한 모든 학과에서 전교 앞자리를 차지하였는데 현서법대회에 나가 현장(县长)상까지 받았다. 소학교 5학년때 형님들은 공부 잘하는 동생더러 룡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에 시험치게 하였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지만 입학금이 문제였다.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13살 박문일은 둘째형님과 함께 룡정과 팔가자사이를 오가며 소금장사를 하였다. 어뜩새벽에 일어나 90리길을 걸어 한밤중에 돌아왔다. 입학금은 마련하였으나 하숙비가 문제였다. 궁여지책으로 둘째형이 룡정에 복장점을 차리고 소금장사로 모은 입학금으로 집을 맡고 땔감도 사고 쌀도 샀다. 하지만 일감이 들어오지 않아 결국 입학금만 말아먹었다.

    마침 광복과 함께 룡정에는 인민학원이 섰는데 박문일은 형님의 권고로 이 학원 야간부를 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낮에는 형님과 같이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였는데 복장점에 수입이 생기자 야간부에서 주간부로 옮겨 공부했다. 박문일이 연변대학에 입학한것은 고중1학년 때인 1949년 3월이였다.

    박문일교수는 이 시기를 회억하면서 《어려운 환경속에서 두 형님의 희생이 없었다면, 그리고 위대한 중국공산당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것》이라고 말한다. 공산당이 있었기에 광복이 왔고 인민학원이 있게 되였으며 무료공부를 할수 있었다는것이다.

    1952년 연변대학 력사학부를 졸업한 박문일은 20세의 새파란 나이에 대학교의 교원이 되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는 선후하여 연변대학 력사학부 학부장, 정치력사학부 학부장 겸 당총지서기, 교무처장, 과학연구처장, 조선문제연구소장과 민족문제연구소장 겸 연변대학당위 부서기 등 중책을 맡고 박규찬교장을 보필해오다가 1982년 11월부터 1998년 10월까지 연변대학 교장, 당위서기(겸 1983~1986년) 등 직을 력임하면서 모든 심혈을 학교건설에 바쳤다. 1985년 7월에 길림성정부로부터 교수로 비준받은 박문일교수는 중국조선력사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중국사학회 제3, 4, 5기 리사, 전국인민대표대회 제6기, 7기 대표, 길림성정협 제8기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93년에는 《세계지구사-국별사(조선사)》 박사학위 수여권을 획득하면서 연변대학 력사계의 첫 박사생도사로 된다.
    이외에도 박문일교수는 선후로 길림성력사학회 부리사장, 연변사회과학련합회 고문, 길림성사회과학련합회 부주석, 중국민족사학회 고문 등 직무를 력임했다. 80세를 넘긴 현재에도 박문일교수는 중국조선사연구회 명예회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명예회장, 한락연연구회 명예회장, 연변독서학회 회장, 연변인물연구회 회장, 한국해외한민족교육진흥회 해외고문 등 직을 맡고 학술연구활동을 견지하고있다.

    박문일교수가 본과생, 연구생들의 중국고대사, 세계현대사, 고대중조일관계사, 력사과학리론 등 과정의 교학과 박사생론문지도를 해오면서 편집출판한 《력사사전》, 《조선간사》(합저), 《조선, 일본에 끼친 중국고대문화의 영향》, 《중조일관계사》(합저), 《중국조선족력사 발자취》(8권 총서) 등 저서들은 대학의 교재로 사용되여 중국에서의 연변대학 사학연구특색을 보여주었고 조선사연구의 위치를 튼튼히 굳히였다. 그가 국내외에 발표한 《1231-1260년간 몽려전쟁과 외교지쟁》, 《력사상 <중>과 <외>의 구분문제에 대한 초보적인 탐구-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론함》, 《1906년-1919년간 중국동북조선족인민의 사립학교 반일교육운동 및 그 력사적작용》, 《중국조선족반일근대교육의 걸출한 선구자 김약연》 등 론문은 객관적이고도 설득력이 강해 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당창건 90돐을 맞으면서 박문일교수는 《당의 민족정책의 해빛과 연변대학교》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있다.

    《나는 위대한 당의 은덕으로 연변대학교의 제1기생으로, 62년의 연변대학교 동반자의 한사람으로 80을 넘긴 리직교수이다. 당창건 90돐을 맞아 학교와 그속에서 걸어온 60년을 돌이켜보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이 없다>는 우리 중화민족의 애창 대합창곡은 영원한 민족대단결의 합창곡으로, 민족부흥의 행진곡으로 되리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다지게 된다.》

    《나는 연변대학교의 창립과 그의 발전에서 이 점을 찾아보았다. 건국전 인구가 100만명밖에 되지 않는 조국의 동북변강 연변지역에 중국에서의 첫 소수민족대학인 연변대학교가 창립된것은 다름아닌 당의 민족정책의 결실이다.》

    《1949년 3월 20일에 불과 3개월의 준비를 거쳐 문리공농의학과가 겸비한 조선족종합대학교가 중국대지에 탄생하여 고금중외에 없는 기적을 창조했다. 이는 당의 정확한 민족정책과 조선족의 드높은 교육열의 접목에서 이루어진것이다.》

    《학교가 창립된 후 학교발전의 관건시기, 관건문제들에서 당은 더욱 높은 차원에서 민족정책의 특수한 비례로 학교의 지속적인 발전을 밀어주었다. 연변대학교는 1990년대 전국대학관리체제개혁에서 성공한 경험을 두차례나 전국에 소개했고 1996년 6월에는 새 연변대학교로 거듭났다. 이해 12월 길림성 56개 대학교가운데서 길림대학, 동북사범대학과 함께 국가교육부 《211공정》 즉 21세기에 중점적으로 양성하는 100개 대학교의 하나로 선정됐고 2001년 6월에는 국가교육부로부터 서부개발중점건설대학교로 지정됐으며 2005년 11월에는 길림성과 국가교육부 공동지원건설대학교로 지정됐고 올 5월에는 학교의 제2차 창업으로 37.5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신교구확건공사가 준공됐다.》

    연변대학을 눈동자처럼 사랑하는 박문일은 16년간 연변대학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림민호, 박규찬 등 선인들의 리념을 잘 이어가는것을 주요한 정신지주로 삼고 학교건설을 틀어쥐였다. 재임기간 가장 힘들었고 또 보람찼던 일을 꼽으라면 그는 《211공정》을 꼽는다. 21세기에 중국 1000여개의 국립대학들중에서 100개의 대학을 선정하여 국가의 집중적인 지원과 육성을 진행한다는 방대한 계획인 《211공정》에 지역적으로 변강에 위치하고 소속지역 경제문화발전이 상대적으로 뒤쳐진 연변대학이 이 공정에 선정된다는것은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1996년 6월, 연변지역의 5개 대학은 자원통합과 운영효률화를 취지로 합병을 진행하여 새로운 연변대학으로 거듭났고 그후 피타는 노력을 거쳐 《211공정》중점건설대학에 선정되는 성과를 이룩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민 전임 연변대학 교장은 이렇게 평가하였다. 《새로운 연변대학의 합병전략은 국가의 대학교육개혁의 추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민족교육의 장기발전전략으로 결단을 얻어낸 성과였는바 연변대학의 경험은 국가교육부에서 조직하는 대학개혁경험교류회에서 소개됨으로써 당시 교육분야를 담당하고있었던 리람청부총리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연변대학의 지명도는 크게 상승하였다. 경제적, 문화적으로 중국의 주변부에 있고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211공정>중점건설대학-국가중점대학으로 부상하기까지에는 박문일교장님의 미래지향적인 발전전략과 결단력, 명석한 교육리념, 그리고 정직성, 신뢰성, 겸허한 인품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이 일구어낸 성과라고 할수 있다.》

    재임시절 박문일교수는 북경대학, 복단대학, 중국인민대학, 길림대학, 동북사범대학 등 국내의 명문대학들과 조선의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대학, 한국의 서울대학, 고려대학, 일본의 메이지대학, 오사까경제법과대학, 미국의 칸사스대학 등 수십소의 대학들과 교제교류협의를 체결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2000년 박문일교수는  KBS한국방송공사로부터 《해외동포상》을 수여받았다. 그는 자신의 일생을 뒤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행운아입니다. 우리 대학교의 창설자이신 림민호, 박규찬 등과 같은 선인들이 대학발전의 튼튼한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이 닦아놓은 탄탄대로로 그들이 물려준 계주봉을 들고 학형, 학우들과 함께 달렸을뿐입니다. 그리고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한마음한뜻으로 학교를 건설하고 발전시켰습니다. 해외동포상은 실질상 연변대학에 주는 상입니다.》
    2008년 9월 26일 박문일교수는 해외동포상 상금과 그가 교장으로 있은 기간에 개인적으로 받은 기부금으로 《박문일장학금》을 설립하였는데 사범학원 학생들가운데서 해년마다 10명의 우수한 학생을 선정하여 매인 2000원씩 발급하고있다. 그 외에도 박문일교수는 왕성한 정력으로 연변청소년들의 독서운동을 지원하고있는데 해마다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 연변조선문독서사협회에서 조직하는 청소년독서행사에 참석하여 수상자들에게 시상하고 격려의 말씀도 해주고있다.
    박문일교수는 자신의 인생철학이 담긴 좌우명을 네가지로 개괄하였다. 《첫째, 연변대학은 나의 집이다. 둘째, 나는 크게 빚을 지고있는 사람이다. 셋째, 연변대학에서 하는 일은 종생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넷째, 고통속에서 락을 본다(苦中取乐).》 
    전국문하교육분야군영회 대표, 전국교육계통로동모범, 전국교육계통선진일군인 박문일교수는 국무원으로부터 정부특수수당금을 향수하고있다.[인터넷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