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 나의 량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

 

    의사는 천직이다. 하늘이 내린 직업이고 하늘이 정해준 직업이란 뜻이다. 늘 아프고 힘들고 괴로운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들과 함께 생사의 고통을 나누는 일이 어찌 천직이 아니라고 할가, 게다가 암을 치료하는 전문의는 더욱 그러할것이다. 그들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환자를 상대로 하기때문에 죽음의 책임과 무게를 더 크게 느낄것이고 더욱더 첨예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기에 의사라는 직종은 어지간한 책임감과 열의가 없이 선택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꺼이 이를 천직으로 삼고, 묵묵히 한평생을 바쳐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중국중의연구원 광안문병원의 전임 부원장-박병규교수이다.

    암의 중의학 치료에서 국내외 권위학자로, 칠순을 넘긴 지금도 박병규교수는 높은 의술과 의덕, W020121101537255450181.jpg 책임감으로 생명지킴이의 성스러운 직책을 톡톡히 감당해나가고 있다.  그의 인생궤적을 조명해보면 갈림길이 없고, 기복이 없는 완만한 릉선이다. 오로지 의학만을 연구하고 환자만을 상대해 왔기때문이다. 그동안 괄목할만한 연구성과도 많고 치료해준 환자도 세상 각 지에 널려있지만 언제나 크게 한 일이 없고, 내세울것이 없다고 말하는 박병규교수, 같은 년대를 살아온 기타 학자들은 시국이 어지러울때마다 기막힌 고생을 하고 초년에는 또 저마다 악착스럽고 눈물겨운 인생드라마를 역었지만, 자신의 삶은 그저 평범하고 평온하기만 했다고 말한다. 이룩한만큼, 가진만큼 나타내려 하지 않는것이 그의 인간적 매력이기도 하다. 호수는 잔잔한 수면때문에 고요하고 정체된 느낌을 주지만 그 속에는 만물을 포용하고 새 생명을 키울수 있는 엄청난 에네지를 숨겨두고 있다. 박병규교수가 바로 그런 호수를 닮은 사람이다.

 

다섯 국기를 든 아이

    1937년, 중국인에게는 치욕의 한해였다. 일본군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고, 극악무도한 일본군은 중국 령토를 야금야금 베여먹기 시작했다.

    병규는 그해 1월 4일에 태여났다. 그가 태여난곳은 길림성 해룡현 영성촌,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벽촌이다. 외딴 시골마을이지만, 그곳에도 일본군의 마수는 뻗어있었다. 다른곳과 똑같이 학교는 일본어로 수업을 했고, 일거수 일투족이 일본놈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그러다보니 병규도 소학시절 거의 절반은 일본학교에서 일본식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는 절대 우리말을 할수 없었고 혹시 실수로 했다면 반드시 처벌을 면치 못했다. 어린 병규는 하기 쉬운 우리말을 두고 왜 꼭 낯선 일본말을 해야하는지, 우리말을 하는게 무슨 큰 죄라고 벌금까지 해야 하는지 불만스럽기만 했다. 그게 바로 망국의 설음임을 어찌 알았으랴.

    병규가 소학교 3학년이 되던 해, 마을의 일본놈들은 개에 쫓기듯 허겁지겁 어디론가 사라지고, 곧 일본군의 투항소식과 함께 산간벽지에도 항전 승리의 고고성이 메아리를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승리의 희열이 채 가셔지기도 전에 해방전쟁이 터졌다.  1946년 4월, 마을에는 국민당 군대가 들어와 진을 쳤다. 그전까지만 해도 영성촌은 공산당의 영향력이 더 컸고 마을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지켜준 공산당에 무한한 애대를 갖고 있었다.

    1947년 3월 어느날 점심, 자지러진 총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잠결에서 깬 병규는 신발을 대충 끼여신고 마을앞으로 달려나갔다. 팔로군이 철교를 폭탄으로 폭발시켰다고 했고, 두 동강난 철교 한켠에는 지나가려던 기차 한대가 덩그러니 정차되여 있었다. 그렇게 영성촌은 해방을 맞았다.

    그 사이, 주민 절반이 조선족이였던 영성촌에는 대한민국 정부측에서 왔다는 낯선 사람들이 찾아와 개국소식을 전하고 갔다. 당시 영성촌의 조선인들은 조선과 대한민국을 두고 구경 어느 나라가 자기 나라인지 종잡을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여서도 영성촌의 조선인들은 중국 공민이 아니였다.

    1951년 병규가 고중을 다니던 해, 개원에는 큰 물이 졌다. 그러자 국민당 사령으로 있다 해방이 되여 수리부 부장으로 임명된 부작의가 시찰을 내려온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동원해 마중을 나가게 되였고, 병규가 다니던 개원고중은 조선인 학교인지라 조선국기를 들고 나갔다. 그런데 부작의가 조선국기를 보더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 그후 영성촌의 조선인들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엄연한 국민이 되긴 했지만, 병규는 태여나서부터 고중을 다니기까지 무려 다섯가지 기발을 들어야 하는, 서글프고도 혼잡한 시절을 보냈다. 만주땅에 산다고 만주기를 들었고, 일본군이 살판치던 때에는 일본국기를 들었으며 잇달아 태극기, 조선국기를 드는 혼란스러움을 겪었다. 썩 후에야 어엿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이 되여 언제 어디서나 떳떳하게 오성붉은기를 국기로 들게 되였다.

 

말수 적은 우등생

    어릴때 병규는 여느 사내애들과는 달리 조용한 편이였다. 성격도 성격이겠지만, 몸이 허약하다보니 취미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이기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부만은 언제나 남에게 뒤떨어질세라 열심히 하였다. 부모님 또한 한평생 땅과 씨름하며 살아온 농민들이지만, 자식 공부에는 유달리 신경을 썼다. 병규가 중학교를 다닐때 병규네는 이사를 갔다. 그러나 그곳에 좋은 중학교가 없다는 리유 하나만으로 부모님은 단연 이사짐을 다시 쌌다. 맹모삼천이라고 했던가, 자녀들의 학업을 위해서라면 몇번이고 이사짐을 싸고 푸는것이 병규네 부모님께는 큰 일이 아니였다. 그런 부모님 덕택으로 병규는 큰 어려움없이 대학까지 나오게 되였고, 줄곧 학급의 우등생이 될수 있었다.

    병규네는 할아버지때 중국 땅에 건너왔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먼저 건너와 자리를 잡았고 그 뒤로 병규 아버지와 숙부, 고모가 찾아왔다. 그 뒤로 숙부 둘, 고모가 태여났지만, 고모 둘은 젊은 시절 뜻밖의 사고로 숨지다보니 병규 아버지는 4형제로 남게 되였다.

    병규 아버지는 병규가 다섯살 되던 해부터 족보를 익히게 했다. 고향을 등지고 온 설음과 뿌리를 잊게 해서는 안된다는 마음에서였을것이다. 어린 병규 역시 쩍하면 족보를 꺼내들고 읽기 좋아했다.  “조선 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대견리 335번지”, 병규의 머리속에는 영원히 지울수 없는 활자로 각인되였다.

    먼 훗날, 국문이 열리면서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병규는 특별히 그곳에 있는 숙부님을 따라 족보에 있던 그 주소지를 찾아보았다. 그러고보니, 늘 고향을 그리워하던 부모님의 소망을 이루어드린것 같아 마음이 뿌듯했다.

    병규는 고중 시절을 료녕성 개원중학교에서 보냈다.

    고중 3년도 눈깜짝할사이에 지나갔고, 어느덧 인생 진로를 선택해야 할 대학입시를 맞이하게 되였다. 대학지원을 앞두고 병규는 고민에 빠졌다. 부모님은 든든한 뒷심이 되긴 했지만 자녀의 대학입시를 두고 방향을 잡아줄 처지까지는 되지 못했다. 모든걸 혼자서 결정해야 했다. 그때 병규의 머리속에는 선생노릇, 의사노릇이 제일 하기 싫은 일 1순위, 2순위로 올라있었다. 병규는 화학에 특별한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화학쪽으로 마음이 쏠렸다. 그 생각을 친구들에게 말하자, 친구들은 “화학은 실험도 많이 해야 되는데, 건강도 별로 좋지 않은 네가 견뎌낼수 있을지”라는 우려를 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친구들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의학이 가장 적성에 맞는 직업일지 모른다고 권장했다. 그 말을 듣고나서 병규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을 다시 정리해보았다. 조용한 성격이고, 체질도 그닥 좋지 않은 편이니, 강한 활동력이 필요하지 않은 의학이 자신에게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석이조로 의사가 되면 늘 시름시름 앓는 어머님의 병도 치료할수 있지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어 저으기 마음이 동했다.

    며칠간의 고심끝에 병규는 훗날 자신에게 무한한 성취감을 가져다줄, 의학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래서 지망한 대학이 대련의학원이였다.

    어려운 입시를 거쳐, 병규는 1954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련의학원에 입학하였다. 시골마을의 애숭이 소년이 어느새 어엿한 대학생이 되였으니 그야말로 개천에 룡이 난셈이다.

    그 시절, 중국의 의학수준은 그닥 높은 편이 아니였다. 맹장염에 걸려도 병규가 고중을 다니던 개원에서는 수술을 할수 없었고 멀리 철령이나, 심양으로 가야 했다. 그때 농촌에서는 실제로 맹장에 걸리면 죽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병규가 입학한 대련의과대학은 교육수준만큼은 괜찮은 셈이였다. 대학교에는 페수술을 하는 교수 두분이 계셨다. 그중 한분은 세계흉부외과학회 회원이기도 했다.  그때는 페, 심장 수술을 대단한 의술로 쳤다. 그리고 대부분 선생님들은 상해 출신들이였다. 대련의과대학은 1947년에 설립되였는데 그때는 대부분 선생님을 향항에서 모셔왔다. 당시 향항에는 상해출신의 선생님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교수진은 그야말로 탄탄한 실력을 가진 선생님들이였다.

    그 덕분에 병규는 대학교에서 정규적인 교육을 받을수 있었다. 병규는 그렇게 힘들다고 하는 의학공부를 높은 열성과 강한 의지로 잘 소화해냈고,  다양한 의학 지식들을 스펀지마냥 끊임없이 머리속에 빨아들여 자기것으로 만들었다.

 

운명의 귀착점 --- 중의학과 인연을 맺다

    대학교에서 병규는 서양의학을 전공했다. 졸업해 서의가 되는게 당연지사였지만, 병규에게만은 꼭 그런게 아니였다.

    병규가 대학에 입학할때만 해도 중국에서는 중의학이 전통의학임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에 중의학과를 특별히 개설하지 않았다. 1956년에 와서야 중의학대학이 일떠서고 중의학도 정규적인 교육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병규네가 졸업하던 때, 모택동은 중서의결합에 관한 특별지시를 내렸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중의학에 대한 중시도가 고조에 이르렀다. 이 같은 시대적 배경으로 서양의학을 공부한 병규는 뜻아닌 중의연구원에 배치받게 되였다.

    뜻밖의 결과이긴 했지만, 병규는 사회에 진출한 첫 직장에 만족했다. 병규에게는 “중서의결합”이라는 새 길이 열려졌다. 그래도 대학시절 서양의학에 대한 계통적인 학습이 바탕이 되여서인지, 병규는 중서의결합에 쉽게 다가섰다.

    당시 중의학에 관한 지식이 결여했던 병규는 국가위생부에서 조직한 제3차중의학 학습반에 들어가 꼬박2년간 중의학공부에 매달렸다. 그러고나서 1962년 2월 북경 서원중의병원 침구과에 배치받았다. 그 이듬해 병규는 다시 중국중의연구원 광안문병원으로 전근돼 당뇨병치료와 연구에 종사했다.

    그동안 국내에서는 대약진에 이어 문화대혁명까지 무시무시한 운동이 많이 일어났다. 병원은 그나마 다른곳보다 낫긴 했지만, 그래도 외딴섬이 아닌이상 꽁무니정도는 따라가야 했다. 그런 시국에서 병규는 피신술을 썼다. 처음에는 그도 운동에 호응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더 굳어졌고 그때 마침 위생부에서 의료팀을 조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다 싶어 병규는 자진신청해 의료팀에 들었다. 그래서 간곳이 호북성 마창이라는 곳이였다. 1967년 3월부터 시작해 반년동안 병규는 그곳에서 마을사람들을 위한 의료봉사를 진행했다. 병규는 이런 방식으로 운동을 외면할수 있어 좋았고 “사회봉사” 경력까지 쌓을수 있어 큰 만족감을 느꼈다.  운동이 가장 치렬하던 68년도에도 병규는 의료팀으로 나가 시국을 묘하게 피했다. 그는 “의사”라는 신분과 또 시기적절한 현명한 선택때문에 그 시대를 살아온 많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시대의 아픈 추억같은 것을 남기지 않게 되였다. 어쩌면 행운이라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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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함께

행복의 원천, 힘의 원천 --- 가정을 이루다

    그 사이 병규는 인생의 또다른 격변을 맞이했다. 바로 사업에서나 생활에서나 큰 뒤심이 되여줄 인생 반려를 만나 가정을 이룬것이다.

    집을 떠나 오래동안 조선족이 적은 지역에서 공부하고 사업해온 병규에게는 조선족 처녀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한족을 안해로 맞아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던차, 숙부님이 제안을 해왔다. 1962년, 휴가차 고향에 돌아갔는데, 숙부님은 “강순덕”이라고 하는 처녀를 알선해주었다. 어릴적부터 한 동네에서 자란 처녀였고, 고중을 졸업하고 선생으로 있다고 했다. 어릴적부터 참하고 아릿다웠던 기억이 어렴풋이 들었고 또 숙부님의 제안인지라, 만나보기로 했다.

    첫 만남을 가져 이듬해인 1963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8년간 두사람은 견우직녀로 생활해야 했다. 소학교 선생으로 있었던 그녀는 결혼하고서도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장춘약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삼년간 공부하고 그녀는 “지식인들이 농촌에 내려가야 한다”는 지시를 받들어 시골병원에 약제사로 갔다. 그러다보니, 부부가 만날 시간은 1년가도 며칠되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멀리 떨어져 있어도 두 사람의 사랑을 끈끈하게 이어줄 소중한 새 생명이 태여났다. 아들이였다. 아들은 그들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병규는 몸은 비록 북경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언녕 안해와 아들에게 날아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규는 북경이 자신이 한생을 뿌리밖고 살 거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늘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했고 1967년에는 인사서류까지 현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안해가 기어이 북경을 선망하는 바람에 결국 안해를 중의연구원으로 조동시키고, 북경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안해가 북경으로 온 1971년, 부부의 상봉을 축복이나하듯, 이쁜 딸이 태여났다. 아들 하나, 딸 하나 그야말로 남부러울것 없는 오붓한 가정이였다. 그후 아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선무구(宣武区) 방역소에서 일하다 일본유학을 하고 지금은 모 일본 회사의 중국대리로 사업하고 있다. 딸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수도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프랑스 제약회사에서 사업하고 있다. 가족은 병규에게 있어서 환자들에게 진액을 쏟고 돌아오면 편안하게 쉴수 있는 안식처였고, 환자들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할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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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암과의 도전

    중국중의원에서 당뇨병 연구와 치료에 진력하던 병규가 암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것은 1974년, 소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한 암환자를 만나서부터이다. 당시 병규는 자신이 맡은 분야가 아니고 전업 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간곡한 부탁으로 처방을 써주었다. 2년후 알아보니 그 환자는 그때까지도 살아있다고 했다. 퍽 위안이 되였다. 그후 역시 지인의 소개로 멀리 연변에서 찾아온 환자를 진료하게 되였다. 걷보기에는 암환자라는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보였다. 그러나 정밀검사를 해보니 페암말기였다. 크게 손을 쓰기도 전에 환자는 저 세상으로 갔다. 그때 병규는 암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를 체감할수 있었고 그들을 사선에서 끌어내지 못한게 못내 안스럽기만 했다. 이렇게 지인들의 소개로 우연히 만난 암환자들을 상대하면서, 병규는 너무나 손쉽게 생명을 앗아가는 암이라는 무서운 질병에 대해 더 알고 싶었고, 고통에 시달리는 암환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원장에게 암 진료 분야로 자리를 옮기고 싶다고 신청하였다. 그러나 원장은 20년동안 해온 연구를 접고 새 분야를 선택한다는게 과연 바람직한 일인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장했다. 결점이라면 결점일지도 모르는 소심한 성격때문에 병규는 지도부의 의견을 듣고 생각을 접었다. 그러나 암과의 인연은 거기에서 끊기지 않았다.

    1975년 주은래총리가 암으로 세상 떴다. 그러면서 나라에서는 암을 더 중시하게 되고 각 병원에서는 그 흐름에 따라 종양과 발전을 다그치게 되였다. 광안문 병원에서도 종양과를 확대하고 병동을 세울 계획을 내왔다. 당시 병원의 당지부서기로 있던 천서우교수는 병원의 지도자층과 함께 종양과 새 적임자를 두고 의논하였다. 원장은 그 전에 병규가 암을 연구해보고 싶다고 한 청구가 생각나 기꺼이 그를 추천했다. 준비 있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고 할가, 병규는 1975년 종양과에 배치받았다. 그때로부터 병규는 암을 쫓는 “저승사자”가 되여 전문 암을 치료하는데 몰두하게 되였다. 그는 암환자가 많은 하북성 한단지역에 가 현장 고찰도 진행하고 밤낮을 이어가며 관련자료를 찾아가면서 암 중약치료제 연구개발에 들어갔다.

    그러던 중, 암에 관한 전업지식과 의술을 높여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개혁개방의 봄바람과 함께 국문이 열리고, 지식인들에게 자격심사와 외국어시험에 통과되면 선진국에 가 공부할수 있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병규가 있었던 종양과 주임은 훨씬 개방적인 관념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양과 직원들도 반드시 외국에 나가 더 좋은 경험과 의술을 쌓아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러면서 그는 류학 명단을 짜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종양과에는 외국어를 할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늘 외국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병규가 당연히 1인자로 떠올랐고, 결국 병규는 시험을 본 열다섯명중 유일하게 제1차 합격자로 일본에 류학 갈 기회를 얻었다. 역시 준비 있는 자에게 기회가 차례진다는 말은 틀린데가 없었다.

    병규는 어릴적부터 언어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장점이라고 이야기했던것도 바로 언어에 관한 재질이다. 고향을 떠나 오래동안 한족 지역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은 보통 우리말에 약하다. 또 한어권의 영향을 받아 우리말을 한다고 해도 한자식 단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50년 가까이 북경에 살고 조선족이 거의 없는 직장에서 사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토 하나, 철자 하나까지 신경 써가며 표준적인 우리말을 류창하게 구사한다. 그가 이 같이 철저하게 우리말을 익히게 된데는 초중시절 조선어과 선생님의 영향이 컸다. 수업시간, 병규는 질문을 받고 대답을 했는데 사투리를 많이 섞어 쓴 모양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를 사투리대장이라고 지적했다. 그게 얼마나 서러웠던지 집에 돌아가 펑펑 울었다. 그 뒤로 그는 자기가 쓰는 언어에 대해 유달리 신경을 쓰게 되고, 고중에 가서는 조선어과 대표로까지 선거되였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해서는 외국어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학교에서는 소수민족 학생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어려운 외국어 공부가 면제되였다. 그러나 병규는 그것이 싫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수업시간마다 학생수에 맞게 강의내용을 등사물로 찍어 배포했다. 당연히 수업에서 제외된 병규에게는 차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작정 빈손으로 로어 수업에 뛰여들었지만 도저히 따라갈수가 없었다. 병규는 결국 로어는 포기하고 소학시절 조금 배워 기초가 있는 일어를 자습하기 시작하였다. 병규가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후에는 외국어 참고서도 나오고1977년에는 라지오에서 일어교육을 시작하기도 했다. 병규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는 짬짬히 책을 보고 방송을 들으며 일어뿐만아니라 영어까지도 자습했다. 그런 노력때문에 류학의 기회도 병규에게 제일 먼저 돌아가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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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립암쎈터 내시경교수 池田茂人과 함께

    1979년 4월, 그는 일본 류학의 길에 올랐다. 2년동안 그는 일본 도꾜의과치과대학 제2내과에서 연수하는 한편 도꾜국립암쎈터에서 페암에 관한 진단과 치료법을 연구하였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의 저명한 페암전문가이고 연식섬유기관지내시경(软式纤维支气管镜)과 기관지촬영기술 (支气管造影) 창시자인 이께다 시게또교수로부터 많은 지식을 전수받았다. 그리고 도꾜의과치과대학 제2내과의 저명한 다께우찌 지우고루우에교수로부터 호흡기계통 질병 치료법을 배우기도 했다. 2년간의 류학생활은 훗날 그가 페암 치료에서 두각을 보일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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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학기간 내시경 시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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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립암쎈터 내시경교수 池田茂人의 초청으로 학술대회에서 연설

 

    귀국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종양과 주임으로 발탁되였고 교수직함을 받았으며 1985년에는 부주임의사로, 1986년 1월에는 부원장으로까지 승급을 거듭하였다.

부원장으로 승급한 뒤, 비록 행정업무가 많아졌지만 그는 의사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고 연구와 환자 진료에 소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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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진찰중

환자를 먼저 생각하는 의사

    그동안 박교수는 국가 제7차5개년계획 돌파과제인 “익기양음청열해독제(益气养阴清热解毒剂), 원발성 페암말기 환자  림상치료와 실험연구”를 진행했다. 그의 주도하에 말기페암을 치료하는 중약 “가페청화고(茄肺清化膏)”가 연구제조되고 이 과제는 중국 중의원연구원과 국가중의약관리국으로부터 과학기술연구성과상을 수여받았다. 잇달아 그는 또 “제8차5개년계획”, “제9차5개년계획” 돌파과제, 북경시 과학기술돌파과제, 중국중의원 혁신공정 및 국가자연과학기금과제 등을 도맡아 추진하였다. 중의연구원의 종양연구과제 핵심에는 늘 박교수가 있었다.

    그는 또 1985년이후로 선후하여 일본, 조선, 한국, 미국, 타이, 싱가포르 등 나라에 가 학술방문을 진행하고 여러 중요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무게 있는 연구성과를 피력해 국내외 학자들의 이목을 끌고, 중국 중서의 결합 암 치료학자로서의 성망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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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한 한의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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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국내 종양학계 의사들과 함께 모스크바학술대회 출석

 

    이 밖에도 박교수는 박사생 지도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우수한 인재들을 양성해냈다. 그에게서 의술을 전수받은 학생들은 저마다 교수님의 자상함과 엄밀한 학술태도, 높은 의술과 의덕에 깊은 감회를 받는다.

    과학연구, 후대교양 등 분야에서 이 같이 많은 성과를 이룩했지만, 박교수에게는 그래도 환자치료가 우선이였고,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수 있는 가장 보람있는 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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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 박사생들과 함께

 

    중의료법은 주로 보조 수단을 리용해 암 세포의 생장을 억제하고 방사선 치료와 같은 서의 치료에서 오는 부작용을 덜어 치료효과를 높이고 암 재발이거나 전이를 통제하는것이다.

    이 같이 종양치료에서 중의학의 역할은 홀시할수 없고, 우리나라에서는 중서의결합이 암의 독특한 치료법으로 자리매김했다. 서의치료를 거부하는 환자가 있더라도 중의치료를 거부하는 암 환자는 거의 없을 정도로 중의치료는 환자들의 각광을 받는다. 게다가 다들 성망 높고, 의술이 좋은 의사에게서 치료를 받으려하다보니 박교수에게는 환자가 끊길 사이 없다. 박교수는 현재 전국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암의 중서의 결합 치료에서 권위적인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요즘 매주 두차례 특수문진에 나와 병을 본다. 특수문진 의료진은 병원의 이름난 교수들로 이루어졌으며 회진비도 꽤 비싼 축이다. 그중에서도 박교수의 회진비가 가장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년전에 예약을 해야 할 정도로 진찰받기 어렵다.  박교수에게는 특히 멀리 외지에서 찾아오는 환자들이 많다. 박교수는 그들을 대할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한다. 내몽골에서 찾아온 한 페암환자는 박교수의 진찰을 받으려고 몇달전부터 예약을 해두었다고 한다. 처음 박교수가 지어준 중약을 복용하고나서 그 환자는 고통이 많이 줄어들고 신심도 생겼다며 박교수님을 만나 따뜻한 말 몇마디 들어도 병이 많이 치료된것 같다고 말했다.

    박교수는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것이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신조를 갖고 환자를 대한다. 학생들을 교양하면서도 박교수는 늘 이 점을 곱씹는다. 그는 의사는 반드시 환자에게 알맞는 치료법을 제시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중의라고 해서 중의학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환자를 마주하면 먼저 서의학에 의존한 검사결과를 잘 검토하고 환자가 수술이 필요하다면 중의 치료는 잠시 접어두고 먼저 수술을 권장한다. 그리고 환자와는 수술을 받고 나서 다시 회진을 하라고 일러준다. 무책임하게 처방만 적어주는 일은 박교수에게 있을수 없는 일이다.

1984년, 장춘에서 환자 한분이 박교수를 찾아왔다. 환자의 말에 따르면 장춘의 유명한 교수님으로부터 진료를 받았는데, 교수님이 페암 말기니까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당시는 화학료법도 그닥 성숙되지 않은 상황인지라 그 교수는 북경의 이름난 중의를 소개시켜줄테니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박교수는 그 환자를 만나게 되였고 곧 환자를 입원시켰다. 박교수는 일본에서 내시경시술을 배웠던지라 직접 환자의 페내시경을 시행했다. 그랬더니, 뜻밖에 암말기는 아니였고 암조직이 기관을 막아 염증이 생기면서 그 염증덩어리가 엑스레이상에서 큰 암덩어리로 보였던것이다. 박교수는 즉시 환자에게 수술을 권장하고 다른 병원에 있는 동창에게 소개시켜줘 수술하게 하였다. 박교수의 정확한 진단으로 그 환자는 아직까지 살아있다. 그 당시 박교수가 필요한 진찰을 하지 않고 단순한 중의치료만 했더라면 전혀 다른 결과였을것이다. 때문에 박교수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은 양의나 중의가 다 갖추어야 할 의덕이며 이것이야말로 진정 환자를 위한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환자를 대함에 있어서 높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역시 박교수가 늘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다. 환자가 의사를 찾는것은 그 의사를 신임하기때문이다. 박교수는 그런 신임을 갖고 찾아오는 환자에게 병세에 대한 견해나 판단을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아무말없이 알아서 처방만 써주는 의사는 가장 무책임한 의사라고 비난한다. 환자가 별다른 의심없이 그 의사의 처방만 믿고 더 필요한 진찰을 받지 않아 생명까지 지장 받는 엄청난 결과를 낳을수 있기때문이다.

    박교수는 또 “화학치료는 너무 고통이 심해 중약만 먹으면 안되겠냐”는 환자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박교수는 난감하기 그지없다. 물론 화학치료가 100% 효과가 있는것은 아니다. 40% 암은 효과가 있을수 있고,  30%는 효과가 없는 동시에 손해도 없으며 30%는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할수 있다. 박교수는 이런 점들을 잘 설명해준 뒤, 판단은 가족에게 맡긴다.

    그리고 박교수는 농촌에서 어렵게 찾아온 환자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적은 쪽으로 처방을 쓰는 배려도 아끼지 않는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히포크라테스,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자기 분야만이 아닌, 한발 더 나아가 통합적인 차원에서 의학을 연구하고 50년 가까이 환자와 함께 하면서 무엇보다 인간적인 치료를 생각한 박교수는 진정 인류를 위한 의술, 환자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까지 고려했던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정신을 그대로 실천하였다. 결코 원치 않았던 의사직업이 운명의 선택으로 되여 박교수는 거기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였다.

    70여성상을 돌이켜 보며 박교수는 가장 후회스럽지 않은 점이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온것이라고 하였다.  있는 그대로 살고, 남을 진솔하게 대하며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여느 영웅들처럼 남을 위해 자신의 모든걸 바치겠다는 각오를 가진 적도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직업 자체가 병들고 다치고 죽어가는 사람의 건강과 생명을 다루는 천직이고 그 직업에 한점 부끄럼없이 조용히 한생을 바쳐온것이 그의 삶을 결코 평범치 않은 삶으로 되게 하였다.

    그는 늘 겸손하고 매사를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대해왔고, 남보다 월등하게 두각을 내미는것을 싫어했으며 자신이 아니면 안되는 일외는 절대 남을 앞질러 나가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소심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때문에 어지러운 시국에도 몸을 사릴수 있었고, 조용히 의학연구에만 정진하며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 의술을 베풀고 인간다운 의사로 남아 조선족으로서 3급병원의 부원장으로까지 승진할수 있지 않았을가, 인생사를 담담하고 너그러운 마음가짐으로 연출해온 그를 호수를 닮은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중앙인민방송국 조향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