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020121228376085736453.jpg     아직 소한이 달포나 남았는데도 추위는 맹기승을 부린다. 이곳의 겨울풍경은 어쩔수 없이 스산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룡정시 지신진 명동촌으로 가는 길 량켠은 누렇게 말라버린 풀들이 불어치는 강바람에 되는대로 몸을 맡기고있다. 백여년전 얼음도 풀리지 않은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낯선 이곳에 보습을 박은 이주 1세대들의 심정을 되짚어본다.

    명동촌의 력사에 관해서는 소설가 김혁씨가 다년간 연구를 많이 해왔다. 고향이 룡정인 그는 2년전에 이미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에 련재를 끝냈고 최근 인물연구시리즈 “윤동주를 위한 29개의 키워드”를 《문화시대》에 련재, 곧 출간을 앞두고있다. 《장백산》에 룡정관련 장편기행을 련재, 명동을 폭넓게 언급하면서 국내외 독자들의 열띤 호평을 얻고있다.

명동촌에는 언급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다. 지신진정부 선전위원 김미선씨의 열정적인 안내하에 명동촌을 둘러보고 마을 주민의 집도 방문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치렬한 항일운동과 철저한 교육운동의 책원지였던 명동촌이 배출한 유명인사들을 언급하지 않으면 안될듯싶다. 김혁씨는 김약연을 그 키워드중 명동의 진정한 첫번째 주인공으로 고집한다.

 

W020121228381874269727.jpg     “명동 윤동주생가”라고 씌여진 돌비석을 에돌아 비탈길을 따라 명동촌으로 내려갔다. 윤동주생가를 지나 곧장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면 네귀 번듯한 명동학교가 동쪽을 바라고 서있다. 김약연을 말할라치면 명동학교를 떼여놓을수 없다.

    1885년 청정부의 봉금령이 해제되자 조선 무산으로부터 종성대안에 이르는 200리 두만강 이북이 조선 이주민들에 의해 전부 개간됐다. 이렇게 드디여 바람 세찬 간도땅에 “동쪽을 밝힌다”는 명동이 일어섰다. 조선인 공동체인 명동촌은 간도문화의 발상지이자 이주민들이 선망하는 “간도 제1촌”으로 되였다. 그 중심에 바로 이주당시 근근히 32세였던 김약연이 있었다.

    김약연은 1901년 4월 자신의 호를 따 “규암재”라는 서당을 꾸렸다. 한학을 전수하는 구식교육이였으나 이는 이주민들의 첫 배움터로서 교육사상 아주 큰 의의가 있는것이였다.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으로 페숙된후 일부 선생과 학생이 오게 되자 김약연은 그들과 협상하여 신학교육을 실시하는 명동서숙을 세우고 초대 숙장을 맡게 된다. 숙장부터 교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피끓는 조선의 반일애국지사들과 진보적지식인들이였다. 명동서숙이 바로 명동학교의 전신이다. 3년제 중학부와 중국조선족이주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녀학부가 선후로 증설됐다. 명동학교는 갈수록 생기를 띠고 명성이 높아져 뜻있는 청년들이 연변 각지와 조선, 로씨야의 연해주 등지에서 속속 모여들었고 일약 독립지사 양성기관으로 발돋움했다.

    일제의 “눈에 가시”로 된 명동학교는 결국 1920년 일제에 의해 재더미로 되고만다.

    명동학교는 개교 17년 사이 천여명의 애국청년을 배출한 간도 민족교육의 최초의 요람지였다.

    바로 조선족교육기관의 효시였던 명동학교가 한겨울의 린색한 해볕아래 명동촌의 중심에 구태의연히 서있다. 물론 현재의 건물은 2010년 룡정시에서 자금을 투입해 옛터에 원모습 그대로 복원한것이다. 교실 4개에 사무실 2개로 된 이 학교에서 항일시인 윤동주, 청년 문사 송몽규, 유명 배우이자 감독인 라운규, 조선인 최초의 항공기조종사 서왈보 등이 배출됐다. 원목의 결이 살아있는 책걸상 그리고 교실가운데 자리한 난로, 목재로 된 마루바닥을 뚜걱뚜걱 걸으면서 옛날 이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있었을 사람들을 기려본다.

    명동학교앞 옛날 담배밭자리에는 “명동학교 옛터”라고 쓴 표지석이 외로이 서있다. 거기에 서서 명동학교를 바라보면 오른손켠에 적빛 양철지붕을 한 거의 쓰러져가는 집이 있다. 명동학교 교원들의 관사였다고 한다. 이제는 나가 떨어진 문짝들이 휑하니 벌린 입을 련상케 한다.

김혁씨가 쓴 “민족계몽운동의 선구자 김약연”에 의하면 김약연은 민중교육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명동학교를 둘러싸고 명동촌, 장재촌, 신동촌 등 6개 마을에 야학을 꾸리고 문화를 널리 보급하면서 반일계몽운동을 활발히 벌려나갔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둔 김약연, 독립운동가, 교육가로서 북간도 조선인 사회를 밀고나가는 수령으로 되기에 손색없었던 김약연, 그의 일생은 솔선수범하는 삶, 높은 인격, 남다른 지도력으로 앞장서서 그 시대의 아픔을 구제하려고 몸바친 일생이였다.

    마을을 돌아져 나오는 길, 윤동주 생가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비술나무아래 사각 정자를 씌운 낮다란 “김약연 공덕비”가 아직도 명동촌에 남아있는 김약연의 자취를 실감케 한다.


W020130104464433468556.jpg     명동학교가 배출한 졸업생들은 모두가 항일투쟁에 나섰거나 민족교육자 혹은 문학가나 이름난 예술가로 되였다. 김약연의 누이동생의 아들인 윤동주 역시 명동학교 출신이자 김약연이 가르친 제자였다.

    명동촌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에서부터 커다란 대문이 보인다. 이는 올해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 관광문화산업을 대폭 춰세우기 위해 200만원을 투입해 윤동주생가를 확건하면서 세운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휑뎅그레했던 옛날과 달리 지금의 생가는 돌담과 평평하게 깐 보도블럭, 그리고 윤동주의 시를 새긴 길 량켠의 경관등으로 인해 한결 산뜻해졌다. 다소 인위적인 감이 없지 않지만 관광객들이 다니기엔 많이 편해졌다. 자료에 의하면 윤동주가 태여날 당시 그의 집안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집가운데 하나로 넉넉한 가세를 자랑하였다고 한다. 윤동주의 집은 마을입구 자그마한 과수원에 둘러싸인 큰 기와집으로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 교회당 앞쪽에 자리했다고 적혀있다.

    윤동주생가의 대문을 들어서면 맨먼저 명동교회가 보인다. 발길에 닳아 칠이 거의 벗겨진 마루바닥이 그간 다녀간 사람들의 수를 짐작케 한다. 내부는 명동촌과 명동이 배출한 인물들을 상세히 소개한 명동력사의 전시관으로 꾸며져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면 새로 지은 윤동주기념관이 있다.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해 개관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더 들어가면 비로소 윤동주생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건물은 삼합에서 비슷한 건물을 가져와 복원한것이다. 원래 이 집은 1900년경에 윤동주의 조부 윤하현이 지은 집으로 기와를 얹은 10간과 곳간이 달린 조선족 전통구조의 가옥이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이 집에서 태여났다. 1932년 윤동주가 은진중학교로 진학하게 되자 그의 조부는 솔가하여 룡정으로 이사하고 이 집은 다른 사람에게 팔렸다가 1981년 허물어졌다. 1994년 8월 집이 복원되였으며 2007년 주정부로부터 주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됐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괙들이 이곳을 다녀간다. 한해에 연인수로 3~4만명이 윤동주생가를 찾는다고 한다.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인 송몽규 역시 명동학교출신이다. 소설가 김혁의 “윤동주를 위한 10개의 키워드”에 의하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둘은 어릴적부터 삶과 문학을 같이 했고 며칠을 사이두고 일본 후쿠오카감옥에서 절명했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문단진출도 빨랐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자신의 문호를 “문해”라고 지으며 문학적소망을 드러냈던 송몽규였지만 유감스럽게 그의 작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적다. 일본 후쿠오카감옥에서 윤동주와 함께 의문사를 당한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혔다가 후에 룡정 동산으로 이전됐다.

    명동학교 출신의 인물을 또 한사람 꼽아본다. 각본, 감독, 배우 1인 3역의 영화 “아리랑”으로 큰 파장을 불러오며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로 불리는 라운규, 일제밑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의 한과 슬픔을 그대로 표현한 영화 “아리랑”이 나오게 된것은 명동중학의 민족교육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인물도 많이 배출했고 반일운동의 중심기지였던 “간도 제1촌” 명동촌, 겨울의 명동촌은 조용하기만 하다. 가끔씩 마을을 돌아다니는 삽살개와 창고가득 쌓아올린 황금빛 강냉이가 인가의 온기를 느끼게 한다.

    명동촌 칠도구에 가면 맛있는 감자국수가 있다고 하나 20리를 더 들어가야 한다기에 포기하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마을을 나오는 길,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모를 선바위가 의연히륙도하량켠의 마을을 굽어보며 꿋꿋이 서있다. 굶주림에 쫓겨 찾아온것이 아니라 연변땅에 우리 민족의 “밝은 사회”를 건설하고자 찾아온 그때 그 사람들에게 선바위는 의지의 징표같은것이 아니였을가. 오랜 세월의 흔적은 영원히 소리없이 그 속에 자리하고있을것이다.[중앙인민방송 2013년1월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