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혼인

조선민족의 혼인풍습에서 우선 들어야 할 것은≪동성불혼≫의 풍습이다.

조선민족의 고대종족들의 ≪동성불혼≫에 관한 문헌적재료로는 ≪삼국지≫가 있는데 이 문헌은 조선민족의 고대종족의 하나인 예의 혼인풍습을 언급하면서 ≪동성불혼≫이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성이 같은 사람들간에는 혼인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는 씨족제도가 완전히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불혼≫이라 하기보다는 ≪근친금혼≫이였다고 할수 있다. 이것을 미루어보아 조선민족의 고대종족들사이에서 일정한 혼인규범에 준한 가까운 혈족간의 통혼이 금지되였다는 것이 사실이다.

3국(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이르러 일부일처제에 기초한 가부장적가족이 점차적으로 확립됨에 따라 그리고 한자성의 채용에 의한 성씨관념이 더욱 명백해짐에 따라≪동성불혼≫은 중요한 혼인규정으로 나서게 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신라와 그후 고려의 왕가, 귀족내에서는 ≪동성혼≫,≪근친혼≫등이 존재하였었다. 하지만 이것은 후세에 이르러 비난을 받게 되였으며 점차적으로 금지되게 되였다.

이런 부계에 의한 ≪동성불혼≫의 풍습은 15세기에 이르러 가부장적가족제도에 기초한 종법관념의 확립에 따라 확고부동한 풍습으로 뿌리를 박게 되였다. 이를테면 ≪세종실록≫에 ≪혼례가 처음부터 바로잡혀 이성 5,6촌도 역시 서로 혼인하지 않으니 가히 미풍이다≫라고 기사한 것은 그 좋은 증거로 된다. 더욱이 17~18세기에 들어서면서 실학파에 속하는 진보적례론가들을 비롯하여 사회의 여론은 ≪동성혼≫을 극악한 루습으로 비난하고 그것을 미개한 소치로 돌리면서 ≪동성불혼≫을 우리 민족의 미풍으로 극구 찬양하게 되였다.

이런 ≪동성불혼≫의 원칙은 법제상에서도 규정되였고 또한 이를 위반한 사람에 대한 엄한 처벌규정도 있었다. 례컨대 ≪명률≫에 ≪무릇 같은 성끼리 혼인한 자는 곤장 60대씩 때린다.≫라는 조문이 있는데 이것은 상술한것에 대한 실증으로 된다. 하지만 큰 동성집단을 이루고있는 ≪김≫,≪리≫,≪박≫,≪최≫등 네개의 성에 한해서는 본관이 다른자끼리의 혼인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풍습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는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민족의 혼인형태를 살펴보면 인민들속에서는 일부일처제가 실시되였으며 통치배들과 부유한 계층에서는 축첩행위가 용허되였다. 그리고 지난날에 조혼(早婚)의 풍습이 성행하고 또한 여러가지 원인들로 하여 특수한 혼인형태들이 있게 되였는데 민며느리혼,

데릴사위혼, 누이바꿈혼(물레혼, 맞혼, 삼혼) 등이 그 실례로 된다.

민며느리혼은 10세전후의 며느리감되는 녀아를 남자집에 데려다가 약육하여 성장시킨 다음 아들과 결혼시켜 며느리로 삼는 것을 말한다. 민며느리혼은 ≪녀장남유≫의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로 ≪남장녀유≫의 경우가 많았다. 이런 형태의 혼인에서는 일반적으로 녀자집보다 남자집이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이런 혼인형태는 고대에서 형성되여 내려온것으로서 리조시대까지 전승되였다.

데릴사위혼은 민며느리혼과는 반대로 신랑감이 되는 나어린 남자아이를 녀자집에 데려다가 양육하여 성장한 다음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는 것을 말하는데 이 경우의 사위를 데릴사위 또는 서야자라고 부른다. 데릴사위는 처가살이기간에 녀자가족의 일원으로 되여 가족성원의 대우를 받으며 로동에 참가한다. 데릴사위의 처가살이기간은 일반적으로 약혼으로부터 결혼식까지의 사이였다. 하지만 어떤 데릴사위들은 그의 자녀, 손자까지 생긴 뒤에도 처가의 가족이 되여 같이 생활하거나 일생을 처가에서 살기도 하였다. 데릴사위혼경우에는 녀자집이 남자집보다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는 것이 통례였다. 이런 데릴사위혼풍습은 늦어도 13세기이전부터 있었다고 짐작된다. ≪고려사≫에는 ≪우리 나라 풍습에 나어린자를 받아 집에서 기르고 나이들기를 기다려 결혼시켰는데 이것을 데릴사위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그 증거의 하나로 된다.

누이바꿈혼은 두사람의 남자가 서로 각기 상대방의 누이(녀동생)와 결혼하는 것을 말하는데 생활의 빈곤으로 하여 혼례를 준비할수 없는 조건하에서 경제적 타산으로 호상 딸을 교환하여 아들의 결혼을 성립시켰던것이다. 삼혼은 같은 원칙에서 세가족사이에 교환이 련쇄적으로 진행되는 보다 복잡한 형태의 혼인이다. 다시말하면 자기 안해를 갑은 을에서, 을은 병에서, 병은 다시 갑에서 취하는 식으로 삼자간에 딸을 교환하는 혼인이다. 이런 누이바꿈혼은 신라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해방전까지 비교적 광범히 진행되였었다.

2.   리혼

조선민족은 지난날에 혼인을 효행과 직접적으로 련계시켜 신성시하였고 부부관계가 중간에 끊어지는 것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음과 아울러 리혼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하지만 리혼하는 현상이 없은 것은 아니다. 특히 부권이 확립되고 녀자의 지위가 예속화됨에 따라 남자의 전횡적인 리혼행위가 용허되였다. 말하자면 부에게는 리혼청구가 허용되였으나 처에게는 리혼청구권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리혼문제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그것을 종합해보면 첫째로 음행있는 유부녀는 자녀로 간주하여 강제적으로 리혼을 당하게 되며 둘째로 처를 버릴 때에는 반드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만약 부모의 승낙이 없이 처를 버렸을 때에는 관리일 경우에 정직처분까지 받게 되며 셋째로 확실한 리유가 없이 처첩이 함부로 ≪천거≫하거나 또는 처첩으로서 개가하는자를 금하며 그리고 그것이 첩이 아닌 본처일 경우에는 더욱 엄중하게 취급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처가 음행이 있을 때는 당연히 리혼이 강요되였으나 남편이 처를 버리는데 대한 제한은 그리 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리조시대에 진입하여 유교적인 례교의 보급에 따라 남자의 일방적인 리혼행위가 더욱더 용허되였는바 이른바 ≪칠거지악≫이 그대표적인 실례로 된다. ≪칠거≫라는것은 녀자가 다음과 같은 일곱가지 조건에 해당할 때에는 남자가 일방적으로 녀자를 버릴수 있다는것이다.

(1)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

(2)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

(3)    행실이 음탕한 것

(4)    질투하는것

(5)    나쁜 병이 있는 것

(6)    말이 많은 것

(7)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

이상에서 렬거한바와 같이 남편이 처를 버릴수 있는 원인 또는 조건은 거의 대부분이 리조시대의 봉건적인 대가족제도의 불합리한 요구에서 제기된것이다.

그런데 이상과 같은 일곱가지 조건에 해당하는 사유를 가지고있다고 할지라도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경우가 있을 때에는 처를 버릴수 없었는데 이를 ≪삼불거≫라고 한다.

(1)    남편의 부모를 위하여 3년상에 복한 경우

(2)    혼인 당시에 빈천하다가 후에 부귀하게 된 겨우

(3)    처가 리혼당한 후에 돌아갈 집이 없는 경우

이런 리혼제도 특히 ≪철거지악≫은 우리 민족 부녀들에게 갖은 고통과 불행을 가져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