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련군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11>방송듣기

당창건 100년 특별 기획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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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중국공산당은 창당 100년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1921년부터 2021년까지 백년은 중국공산당이 피와 땀, 눈물과 용기, 지혜와 힘으로 장식해온 100년이였습니다. 중국공산당은 100년간 가시밭길에서 온갖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50여 명에서 9천여만 명의 당원을 가진 세계 제1당으로 성장하였으며 전국 각 민족 인민을 이끌고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을 쟁취하고 국가의 부강과 인민의 행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중화민족이 일떠서고, 유족해지고 강대해지는 위대한 도약을 이룩함으로써 세계가 주목하는 대 서사시를 썼습니다.
 중화민족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100년 동안 조선민족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와 새중국 건설과정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불멸의 공훈을 세웠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의  열악한 전쟁년대로부터 새중국건설의 번영창성을 지켜봐온 조선족 로전사, 로공산당원의 영웅적 업적을 세인들에게 알리고저 흑룡강조선어방송은 창당 100년을 맞이하면서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  특별기획 칼럼 련재를 통해 혁명의 선구자를 기리고 력사에 길이 빛나게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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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리민동지의 구술에 의거해 작성한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련재 제3부: <구쏘련에 가 정비훈련을 하다> 두번째 부분을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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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상륙한 이 도시는 쏘련의 ‘프라하비센스크’였다. 우리는 쏘련군의 안배로 기차를 타고 하바로프스크에 도착해 현지 쏘련인 집에 머물게 됐다. 이름이 ‘베라’인 녀주인이 우리의 일상을 돌봐줬다.
그러나 베라 집에 석달이나 머물면서도 우리는 무선전공부를 시작하지 못했다. 날씨가 추워지자 우리는 또 다른 거처로 옮기게 됐는데 이번의 주숙처 녀주인은 ‘그루니아’라고 불렀다. 우리 셋에게는 모두 쏘련 이름이 생겼는데 리숙정은 ‘리다’, 장경숙은 ‘니나’, 나는 ‘수라’라고 불리웠다. 쏘련인들이 우리의 중국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워하는 리유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안전을 위해서라고 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산책하면서 베라 집으로 걸어가다 우리가 살던 방에 불이 켜져있는 걸 보게 됐다. 호기심에 울타리에 매달려 들여다봤더니 글쎄 오빠 리운봉이 방안에 있는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와 오빠는 쏘련에서 다시 상봉했다. 훌륭한 정찰원이 된 오빠는 짧은 재회 후 곧 국내에 파견돼 정찰작업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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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출발하기 전 조직의 비준을 거쳐 우리 남매는 한 자리에 앉아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오빠는 오동하에서 나와 헤어진 후의 그의 굴곡적이고 아찔한 경험을 들려줬다. 1938년 음력 7월, 오빠는 제1진 서정부대대원으로 풍치강총지휘의 인솔하에 오동강변에서부터 서정을 시작했는데 당시 그는 제6군 제1사 6퇀의 정치부 주임이였다.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친 후, 1939년 초 부대는 북상해 눈강 지구에 이르렀다. 적들의 포위토벌을 피해 오빠는 부대를 따라 얼어붙은 흑룡강을 건너 쏘련으로 넘어왔다.
        쏘련에 도착한후 오빠는 쏘련측의 정찰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그는 무선전 송수신과 정찰기술을 익혔다. 훈련을 마친 오빠는 발신기를 가지고 다시 국내에 파견돼 장춘을 거쳐 할빈으로 갔다. 사업의 수요로 할빈의 지단가(地段街)에 양복점을 차려 신분을 엄호했다.
        오빠는 할빈역에서 흑하, 목단강, 만주리 등으로 향하는  관동군의 군용차량과 병력 분포를 정찰했다. 후에 그는 또 할빈에서 흑하, 가목사, 목단강행 철도 연선의 일본군 수송 상황도 정찰했다.
        일제 강점기의 동북에는 적의 특무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여러 차례 정찰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후, 오빠는 적들의 의심을 받아 미행당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흑하로 전전했다. 어느날 밤, 오빠는 파도가 세찬 흑룡강에 뛰어들어 소년 시절 닦은 좋은 수성으로 강을 건너 다시 쏘련으로 건너갔다.
        1940년 오빠는 재차 국내로 파견됐다. 정찰 임무수행중 특무의 미행을 눈치채고 위급한 고비에 심양행 렬차를 타고 단동을 거쳐 조선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간 오빠는 77세의 할머니와 사촌형을 만나  고향에서 한동안 지내다 다시 쏘련으로 돌아왔다.
        나도 오빠에게 지난 2년 동안 겪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서광해, 배성춘, 오옥광 등 동지가 희생된 것도, 백복후 퇀장이 칠성립자에서 우리를 이끌고 포위를 뚫고나간 것도 들려줬다.
        서광해 등 동지의 희생 소식을 듣고 오빠는 아주 괴로워했다. 오빠와 서광해는 어릴 적부터의 소꿉친구였다. 
        1938년 후로 적아력량의 극단적인 차이와 괴뢰군의 빈번한 군사 토벌, ‘집단 부락’ 정책으로 동북항일 유격전쟁은 극히 어려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인원이 대량으로 줄어들고 보급품과 물자 조달이 극히 어려웠다. 동북항일련군 각 부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유격 운동의 전략적 배치와 활동 방식을 바꾸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공중앙과의 련계를 회복하고 동북 당 조직의 통일된 령도를 실현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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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1940년 1월 24일, 길동•북만성위대표 련석회의(제1차 하바롭스크 회의)가 드디어 쏘련에서 개최됐다. 3월 19일 회의는 2단계에 들어갔다. 중국 측에는 주보중, 풍중운, 조상지가 참석했고 쏘련 측에는 이완노브(伊万诺夫) 쏘련 공산당 극동변강위원회 주석, 왕신림 극동방면군 내무부장과 하바롭스크,  부로슈노프(沃罗什诺夫) 주둔군 책임자 등이 참석했다. 협의 결과, 량측은 중국 당내사무를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쏘련의 변강 당조직과 극동 방면군이 항일련군에 대한 림시 사업 지도와 원조 관계를 구축할것을  확정했다.
        1940년 겨울, 항일련군 3개 군(路军)의 주력 부대가 륙속 쏘련 경내로 철수해 정비훈련을 진행했다. 쏘련 측은 항일련군 부대에 다방면의 편의를 제공했다. 월경부대는 브로슈노프와 하바롭스크 린근에 남•북 두개 야영을 설립했다.
        그후부터 부대는 정상적인 군사•정치 훈련에 들어갔다. 당시의 학습과 훈련은 매우 긴장했다. 우리의 훈련 내용에는 실탄 사격, 반•소대별 공격 련습, 총검(刺刀) 육박전, 칼 부림, 수류탄 투척 등이 있었다. 국내에 파견될 일부 남성 동지들은 스키 련습을 집중적으로 했다. 정치 훈련은 주로 항일련군의 주요 책임자인 주보중이 제정한 정치문화학습 대강에 따라 수업했고, 진뢰와 제2군의 몇몇 지도자들이 교수업무를 맡았다.
1941년 6월 22일, 쏘련-독일 전쟁이 발발했다.
        쏘독전쟁으로 중국 동북의 항일투쟁 형세는 더욱 혹독해졌다. 전쟁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북쪽 야영지의 훈련도 더욱 긴박해졌다. 주보중은 직접 우리를 거느리고 각종 군사기능 훈련을 다그치면서 일본 관동군과의 최후의 결전을 시시각각 준비하고 있었다.
        1942년의 봄이 곧 지나가고, 한여름이 오기 직전 우리는 뜻밖에 강립신을 만났다. 우리는 그가 조상지와 함께 활동한다고 들은 적이 있기에 조상지 장군의 상황을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리다가 나중에야 조상지동지의 희생을 실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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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우리는 조상지동지의 희생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했다. 훗날 적들의 문서를 통해 조상지는 부상 후 약 8시간을 살았다는것을 알게되였다. 그는 심문하는 괴뢰 경찰에게 “당신들도 중국인이 잖소. 당신들은 조국을 팔아먹었소. 곧 죽게 될 사람한테 더 물어볼게 뭐가 있소!”라는 말을 남기고는 더는 입을 열지않고 심문하는 괴뢰 경찰들을 매섭게 노려보기만했다고 한다. 중상을 입었지만 뼈저리는 고통에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는 조상지의 영웅적 기개에 적들은 분노와 두려움에 치를 떨었다.
        세계 반파쑈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항일련군 부대 지도자들은 현재 남북 두 야영에 분산되어 있는 대오와 항일련군 요원들을 모두 집결시켜 통일적으로 관리하기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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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1942년 8월 1일, 동북항일련군 교도려가 정식 편성됐다. 려단에는 총 1500여명의 장병이 있었다. 쏘련 극동방면 홍군측의 위촉으로 주보중이 교도려 려장으로, 리조린이 정치위원을 담임했고 김일성, 왕효명, 허형식, 시세영이 각 교도영(营) 영장, 안길, 김책, 계청이 각 교도영 정치위원을 담임했다.
        교도려는 군사정치 간부를 양성하는 학교로, 장래 항일련군 대오의 발전을 위해 핵심 력량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2년 9월 13일, 교도려는 전체 당원대회를 열고 중공만주성위가 페지된 후 편성된 동북 당 조직 3개 성위의 편제를 정식 취소하고 통일된 ‘독립보병려 중공 동북 당조직 특별지부국’(特别支部局)을 설립했다. 서기에 최석천, 부서기에 김일성이였다. 동북 당위원회는 중공중앙의 정치 로선을 집행했는데 려단 내의 쏘련 공산당조직과 업무상의 상호 련계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으로나 조직적으로는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장기간 동북 전장에서 적들과 고투하던 항일련군의 장병들은 모두 야영과 려단의 정비 훈련을 소중히 여겼다. 부대의 정비 훈련은 병영 건설부터 시작됐다. 불과 반년만에 우리는 100여무 황무지를 개간해 5개의 병영과 기타 시설을 세워 장병들의 학습•생활•훈련수요를 기본적으로 만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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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병영이 건설된 후, 우리의 주요 임무는 군사 훈련과 정치 문화 학습이였다. 군사훈련에는 락하산 훈련, 각종 군사무기 사용, 겨울철 스키전투, 여름철 수영훈련, 통신기술, 전선 구조 등이 포함됐다. 정치학습의 주요 내용은 쏘련 공산당 당사, 사회발전사 및 스탈린의 연설, 보고, 문장이였다. 정치•사상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중국공산당 중앙로선•지침•정책도 중점적으로 배웠다. 동지들은 천방백계로 중공중앙의 해당 문서와 중앙지도자들의 연설을 수집했다. 학습자료는 주로 모택동이 당의 제6기 6중전회에서 보고한 '신단계를 론하다'(论新阶段), 그리고 '지구전을 론하다'(论持久战)의 몇개 장절과 ‘자유주의 반대’, '당의 기풍을 바로잡자' 등이였다. 이런 문건과 저작을 공부하면서 교도 려단 장병들은 전반 항일전쟁의 형세를 리해했을 뿐만 아니라 항전 승리에 대한 신심을 키웠고 사상리론수준이 향상됐으며 작풍을 개선하고 단결을 강화했다. 비록 매일마다 장시간 훈련이 지속됐지만 우리는 항상 활력으로 차넘쳤다.
        야영에서 정비훈련을 하는 동시에 교도려는 또 잇따라 10여개 소규모 부대, 연100여 명을 동북으로 보내 소규모 유격 활동과 군사 정찰을 진행했는데 이는 왜놈들을 타격하고 동북 인민들의 항일 열정을 힘있게 북돋아줬으며 앞으로의 역공 작전에도 충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이 시기에 괴뢰군이 항일련군 교도려에 가입하는 일이 끊기지 않았다. 1942년 7월 7일, 료하(饶河) 동안진에서 70여명 괴뢰군이 봉기를 일으켜 일본 지휘관을 죽인 후 우쑤리강을 건너 항일련군 교도려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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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우리는 야영 주둔지에서 ‘항일 신병 환영 대회’ 를 열었다. 회의에서 주보중 려장, 리조린 정위가 연설했다. 심태산은 유격대 대표로, 나는 녀 전사 대표로 축사를 했다. 우리는 함께 ‘길동군가’ 등 항일 노래를 부르면서 봉기를 일으키고 항일련군에 가입한 신병들을 환영했다.
동북항일련군 전사 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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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흑룡강조선어방송 당창건 100년 특별 기획 련재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 열한번째 부분을 마칩니다. 다음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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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节目由黑龙江朝鲜语广播制作
内容原文选自由李敏口述,李江、刘颖整理的书籍《亲历东北抗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