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련군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12>방송듣기

당창건 100년 특별 기획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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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중국공산당은 창당 100년을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1921년부터 2021년까지 백년은 중국공산당이 피와 땀, 눈물과 용기, 지혜와 힘으로 장식해온 100년이였습니다. 중국공산당은 100년간 가시밭길에서 온갖 간난신고를 이겨내며 50여 명에서 9천여만 명의 당원을 가진 세계 제1당으로 성장하였으며 전국 각 민족 인민을 이끌고 민족독립과 인민해방을 쟁취하고 국가의 부강과 인민의 행복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중화민족이 일떠서고, 유족해지고 강대해지는 위대한 도약을 이룩함으로써 세계가 주목하는 대 서사시를 썼습니다.
 중화민족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100년 동안 조선민족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와 새중국 건설과정에서 피땀을 흘리면서 불멸의 공훈을 세웠습니다.
         동북항일련군의  열악한 전쟁년대로부터 새중국건설의 번영창성을 지켜봐온 조선족 로전사, 로공산당원의 영웅적 업적을 세인들에게 알리고저 흑룡강조선어방송은 창당 100년을 맞이하면서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  특별기획 칼럼 련재를 통해 혁명의 선구자를 기리고 력사에 길이 빛나게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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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리민동지의 구술에 의거해 작성한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련재 제4부: <정돈 훈련, 반공 준비> 를 보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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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년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큰눈이 련거퍼 내려 극동지구는 온통 얼음과 눈으로 뒤덮였다.
        그해 겨울, 교도려의 장병들은 전부 스키를 배우기 시작했다. 전사들의 스키는 진춘수 동지가 나무로 만든것이여서 퍼그나 육중했다.
        우리는 매일 스키를 타고 려단 본부 앞광장에 모여 출발했다. 훈련장을 가로질러 높은 비탈로부터 흑룡강의 한 강목까지 갔다가 큰강을 따라 위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는 다시 아래로 미끌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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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녀전사들중 스키 성적이 비교적 좋은 사람은 김옥순, 전순희, 장경숙과 나였다. 우리 넷은 서로 힘을 겨루며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견지했다. 고강도의 학습과 훈련을 거쳐 얼마 지나지않아 모두들 림해설원을 나는듯이 누빌수있게됐다.
        긴장한 훈련외에도 나는 방송원 일을 맡아했다. 매일 저녁식사후면 방송시간이였는데 나와 쏘련의 다녕이라는 청년 방송원이 방송을 했다.
        1942년 겨울은 쏘-독 전쟁의 제일 간거한 단계였다. 쓰딸린그라드 쟁탈전은 더없이 치렬해 매일 새로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전쟁의 성패가 조국의 광복과도 관계되기에 다들 이번 전쟁에 관심이 컸다.
        어느날 밤, 나는 리조린 정위에게 불려갔다. 부랴부랴 달려 갔더니 리조린 정위는 담화를 서두르지 않고 먼저 자리에 앉으라 했다. 웬지 불길한 예감이 들며 리조린 정위가 대체 무슨 얘기를 할까하며 마음을 조였다.
        한참후 리정위는 드디어 말을 꺼냈다. “리동무, 금방 쏘련군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리동무 오빠 리운봉 동지가 실종됐다오. 지금 어디로 보내졌는지 잘 모른다오.”
        리정위의 말을 듣자 머리가 휭해나며 그 뒷말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오빠? 우리 오빠? 내 오빠란 말인가? 나는 고개를 들어 리정위를 멍하니 바라봤다.
        한참후 다시 정신이 든 나는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오빠가 실종이라니! 오빠는 나의 유일한 가족이였다. 저번에 헤여질때 오빠는 이번에 마지막으로 정찰임무를 수행하러 간다며 돌아오면 본부대로 귀대할 요구를 제출했다고 말했었다.
        그후 내가 어떻게 리정위 방을 나섰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으며 리정위의 위로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조국과 멀리 떨어진 극동대지에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추운 밤에 “오빠, 어디에 있는거예요? 어서 돌아와요”하며 울면서 웨쳤던 기억만 떠올랐다. 울부짓는 광풍이 모든 소리를 삼켜버리고 눈물도 어느새 다 얼어붙었다.
        며칠동안 오빠만 떠올리면 마음이 찢어지듯 아파났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났다. 동지들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지나서야 나는 점차 현실을 받아들였다.
        당시 쏘련과 일본은 “쏘-일조약”을 체결했기에 일본군은 쏘련측의 첩보인원을 체포해서는 비밀리에 처단하고 심문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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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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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중공북만성위 장중부 비서장, 나의 오빠 리운봉 등 동지들은 모두 이렇게 지하 전선에서 희생됐다. 심지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조국과 인민을 위해 희생된 무명영웅들도 수두룩하다.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떠나갔다. 그들은 모두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 당했으며 유골도 남기지 못했다. 그들을 기릴 수 있는 곳 조차 없다는 것이 영원한 아픔이였다. 그렇게 리씨 집안은 나 혼자만 남았다…오빠의 옛친구이며 나의 련인인 진뢰동지가 더 그리워졌다.
        1943년 봄, 진뢰동지가 무장정찰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려사령부는 진뢰동지를 제3영 제6련 정치부련장으로 임명하고 중사계급을 수여하기로 했다.
        비록 우리 두사람은 이미 련애관계를 확립했지만  공개적으로 래왕하지는 못했다. 그때, 우리는 밥을 먹거나 회의를 할 때 모두 대렬을 지어 단체로 행동했기에 거의 개인 공간이 없었다. 다만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때면 대렬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눈길로만 정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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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겨울에 들어설 무렵 조직에서 우리의 결혼을 비준했고 자그마한 집 한채를 내주었다. 우리의 새집은 반지하실로 매우작아 작은 철제침대를 놓고나면 공간이 얼마 없었다.짐이라곤 담요 두장에 짚깔개 하나, 짚을 넣은 베개 두개였다.
        진뢰 동지가 훗날 자주 외웠듯이 례식도 혼수도 없이 그토록 간단하게 우리는 그렇게 결혼을 했다.
        그 날은 1943년 11월30일, 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날이였다.
        1944년 봄에 접어들어 유럽 전장은 전세가 바뀌였다. 쓰딸린그라드 보위전의 승리는 전반  국면을 돌려세웠고 쏘련군은 전선에서 반공격을 개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리의 서광이 나타났다.
        정세가 좋아 짐에 따라 우리 항일련군 전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학습과 훈련에 몰두하면서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 일본침략자와 결승전을 벌여 중국에서 철저히 몰아낼 준비를 했다. 
        1944년 10월혁명절이 다가왔다. 10월혁명절은 쏘련군 군관이 진급하는 날이였다. 진뢰동지는 중사로부터 사무장으로 진급했고 나는 중사로 세줄을 달았다. 이는 우리에 대한 상급령도의 긍정이며 신임과 격려였다.
        씨베리의 한파가 다시 극동대지를 휩쓸 때 나와 진뢰는 행운스럽게도 새숙소를 분배받았다. 주보중 려장과 리조린 정위가 각별히 배려해준 덕분이였다. 집은 매우 작아 침대 하나를 놓고나면 한메터 남짓한 공간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실에서 판자집으로 이사하게 돼 매우 기뻤다. 나는 “별장이네!”라며 기뻐했고 진뢰도 “그러게 참 이쁜 집이요”라고 했다. 
        곧 닥쳐올 대반공에 대비해 이 기간에는 늘 야간긴급  야전연습을 했다. 얼마후 우리는 합숙훈련을 위해 야외 텐트로 이사했다. 밤에 긴급 집합소리가 울리면 전사들은 스키를 타고 전신무장하고 나섰다. 통신대대 전사들은 쏘련에서 새로 나온 무전기와 커다란 고압전지 두개씩 메야 했다. 나는 주로 전보송수신과 번역을 맡았다.
        1944년 쏘련군대가 결정적 승리를 거둔 뒤를 이어 1945년 1월부터 4월까지 유럽전장에서는 중대한 전환이 일어났는바 4월16일 쏘련 홍군은 베를린을 진공하기 시작했고 4월30일, 히틀러가 독일총리관저 지하실에서 자살했다. 5월2일 쏘련군이 베를린을 함락한데 이어 5월8일 독일은 무조건 투항을 했다.
        5월8일 나와 쏘련 방송원 다녕이 제일 먼저 독일 무조건투항 소식을 들었다. 다녕은 바로 풍중운에게 전했고 풍중운은 나더러 즉시 중문으로 중계하라 했다.
        나는 떨리는 소리로 이 소식을 여러번 반복해 방송했다. 그러자 온 영지는 기쁨으로 들끓었다. 서로 끌어안고 환호하며 모자를 벗어 공중으로 던지기도 했다.
        제2차세계대전 유럽전장에서의 승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 줬다. 우리가 조국에 돌아가 대반공을 벌이는  날도 멀지 않았다.
        1945년 5월1일, 진뢰동지는 소위로 승급돼 새 장교복장으로 갈아입고 권총 한자루와 은메달 한매를 수여받았다. 같은날, 나도 준위 사무장으로 승급했다. 진뢰동지가 새로 입은 군관복을 보며 우리 두사람은 더없이 기뻐했다.
        사실 1945년 상반년부터 교도려는 동북지역 반격 준비를 위해 군사훈련의 과목과 강도를 크게 늘였다. 군사훈련은 종목마다 모두 실전 수요로 출발한 것이다. 전체 항일련군 교도려는 군사훈련을 강화하는 동시에 정치학습도 강화했으며 많은 당원과 단원도 발전시켰다.
        1945년 봄은 희망으로 가득찼다. 모두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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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风雪征程——东北抗日联军战士李敏回忆录》插图

        이때, 극동의 하바롭스크에서 쏘련홍군 극동 대일작전 지휘부는 전쟁전 회의를 소집했는데 주보중 려장은 쏘련극동군 제1방면군 말리노브스끼 사령원의 초청으로 이번  회의에 렬석했다.
        주보중 려장이 지휘하는 국제88려는 쏘련 극동군 대일작전대군의 한부분으로 안내와 통역, 정보 등 방면에서 쏘련군을 협조하기로 했다.
        1945년8월8일 ,쏘련 외교인민위원회 몰로또브는 일본대사 사또를 불러 쏘련정부의 대일선전포고를 했다.
        8월9일, 연안신화통신사는 쏘련의 대일본 선전포고에 대한  모택동주석의 성명 “일본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을 방송했다.
        모택동 주석은 “ 중국인민의 모든 항일 세력은 전국적 규모의 반공격을 단행해 쏘련 및 기타 동맹국들과 밀접하고 효과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팔로군, 신4군 및 인민군대는 모두 가능한 조건하에 투항을 원하지 않는 침략자 및 그 주구에 대해 광범한 진공을 실행해 이러한 적들을 섬멸하고  무기와 재산을 탈취하며 해방구를 확대하고 피점령구를 축소시켜야 한다” 라고 호소했다.
        쏘련의 대일선전포고와 모택동주석의 성명은 일본제국주의가 철저히 무너질 날이 곧 다가왔음을 예시했다. 항일련군 장병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즉시 전선으로 뛰여들어 일본군과의 최후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분분히 요구했다.
        이기간, 항일련군 지도자와 동북당조직위원회는 정치, 조직과 행위에 관한 “비망록”을 작성해 항일련군 장병들의 행위를 규범화하고 중국 동북을 해방하는 작전에서 모든 항일련군 장병들은 지휘에 복종하고 규률을 준수해 군령과 정령의 통일을 이루도록 했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졌고 전체 항일련군 교도려의 장병들은 행장을 꾸리고 출발을 기다렸다. 정의가 악을 전승하는 전쟁이 곧 시작될 것이다.
동북항일련군 전사 리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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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흑룡강조선어방송 당창건 100년 특별 기획 련재 '동북항일련군 로전사 리민의 전설적 이야기' 열두번째 부분을 마칩니다. 다음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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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节目由黑龙江朝鲜语广播制作
内容原文选自由李敏口述,李江、刘颖整理的书籍《亲历东北抗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