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창건90주년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렬

              <조선의용군>3지대

1945, 8, 일제가 투항한후, 팔로군 주덕 총사령의 6호명령에 따라  태항산과 연안에 있던 조선의용군은 117, 동북으로 진출해 심양에서 천여명이  참가한 전체군인대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조선의용군은 일부 조선혁명가들이 조선으로 귀국하는 외에 대부분은 동북에 남아 중국공산당과 함께 민주주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방침을 확정하고 조선의용군을 제1지대, 3지대, 5지대로 재편성했는데 제1지대는 남만에서, 3지대는 북만으로, 5지대는 동만으로 진출해 동북에 거주하고 있는 광범한 조선인민을 단합시켜 새로운 민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하기로 결정지었습니다. 

 조선의용군3지대는 사령부의 포치에 따라 주덕해를 비롯한 19 간부들만 북만으로 파견했습니다. 남만과 동만에다 천여명 조선의용군을 파견한것과 달리 북만에 19명 간부만 판견한 것은 그곳에 일찍부터 조선의용군 지하일군이 활동하여 이미 확고한 토대를 닦아놓았기 때문이였습니다. 조선독립동맹에서  1942년에 파견한 조선의용군 지하일군인 김택명() 북만의 조선인을 동원해 반일투쟁을 진행할 임무를 맡고 일찍부터 흑룡강성에서 활동해 튼튼한 군중토대를 닦아놓았습니다. 194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에서 활동해 온 김택명은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군중을 발동했으며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군대를 편성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8.15해방직후인 1945 8 20, 할빈시 도리구 만몽호텔에서 열린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 대회에서  김택명이 서기를 맡았습니다. 한편 북만특별위원회는 각지 조선인 보호사업을 제기하면서 자체 무장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는데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 조선청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1945 8 22일에 김택명은 며칠사이 모인 300여명 조선청년을 도리구 사꾸라소학교, 지금의 할빈시 60중에서 훈련시켰으며 9 25일에는 600 규모의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편성했습니다. 그때 동북항일련군 출신인 리조린이 쏘련군과 협상해 일본군 무기고의 무기를 털어 독립대대를 무장시켰습니다. 시기 김택명의 노력하에 할빈지역 각 현에는 조선독립동맹 조직이 있게 됐고 자체의 무장이 있어 조선사람의 생명재산을 보호할수 있었습니다.

     할빈에 도착한 주덕해는 김택명과 손잡고 194511 25일에 할빈과 린접한 빈현(宾县)경내의 배극도(蜚克에서 조선의용군 3지대 설립대회를 소집했습니다.

이날, 대회에서 정치위원 주덕해가 조선의용군 3지대의 창건을 정식 선포하고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선의용군 3지대로 재편성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이어 김택명지대장이 연설하고 3지대 주요지도간부들의 명단을 공포했는데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 주임에 리근산, 참모장에 김연, 공급처장에 관건, 교도대 대장에 고영룡, 위생대 대장에 공효였습니다.

이리하여 해방초기 <조선팔로군>으로 불리운 신형의 무장대오가 탄생됐습니다.조선의용군 3지대는 흑룡강성 각지에서 가는곳마다 조선인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수많은 청년들이 적극 참군할것을 신청했습니다.

조선의용군제3지대는 설립된 그날부터 할빈해방, 할빈위수, 토비숙청에서 커다란 업적을 쌓았습니다.

일제가 투항한 할빈지구의 정치형세는 매우 복잡했는데 특히 국민당이 할빈을 강점한 토비들의 활동은 더욱 창궐해졌습니다. 그때 관내에서 파견된 팔로군의 대부대는 아직 할빈에가지 도착하지 못했기에 공산당에서 파견한 간부들의 안전을 보장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런 준엄한 시기에 중국공산당의 신임을 받고있었던 조선의용군제3지대는 송강군구의 직속부대로 송강군구사령부의 경위임무를 맡았습니다.

3지대의 부분 지휘원과 전사들은 김택명과 김연의 지휘밑에 팔로군 359려와 송강군구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목란,통하, 방정, 연수, 상지 현소재지를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1945 12 하순의 어느날 새벽에 3지대 2대대는 송화강을 건너 목란현소재지를 들이쳤습니다. 많은 전사들이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했지만 아주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아군이 맹렬히 전공하자 놈들은 현소재지를 버리고 복상구로 도망쳤습니다.

3지대의 2대대와 3대대는 계속해 목란, 동흥, 통하현소재지를 해방한후 1946 2, 연수현 류하툰에 집결해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토비를 숙청했습니다. 그들은 연수와 빈현 경계선에 있는 북가성에서 토비 50여명을 소멸하고 연수북쪽의 홍산구에서 토비 150여명을 소멸했으며 상지현 흑룡궁과 마가점에서 한무리의 토비를 숙청했습니다. 1946 3, 2대대의 두개 중대는 상지현소재지를 들이쳐 국민당선견대가 조직한 보안대 120여명의 무장을 해제했습니다.1946, 9, 3지대 3대대 7중대는 토비들이 활동한다는 정보를 받고 명령에 따라 사리툰으로 향했는데 사리툰 서구에서 토비들과 사우다가 부중대장 박만근 21명이 영용하게 희생됐습니다. 21 렬사의 시체를 처음에는 할빈시내 로씨야공동묘지에 모셨으며 1957년에 할빈인민정부에서는 묘지우에 <21렬사묘지>라고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그후 1974 9월에 렬사들의 유물과 기념탑을 지금의 할빈렬사릉원으로 옮겨왔습니다. 

할빈시의 위수임무를 맡았던3지대는 부대를 파견해 동북국을 비롯한 , 시의 주요한 당정기관을 보위했으며 송화강 대철교, 발전소 곳을 수비했습니다. 그리고 일부 병력을 시교농촌에 파견해 토지개혁의 순조로운 진전을 보장했습니다.

1947, 3지대 1대대는 명령을 받고 가목사, 부금, 화남 등지에 무기와 탄약을 보호했으며 2대대는 서만, 남만에 가서 전선으로 무기탄약을 수송할 임무를 수행했으며 3대대는 수분하와 할빈사이의 무기수송을 보위했습니다.

3지대는 무장부대이면서도 지방공작대였습니다.그들은 각지에서 토비를 숙청하고 인민을 보호했을뿐만아니라 한편으로는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각지의 정권건설을 지원했습니다. 정치위원 주덕해와 정치처에서는 부대내 정치사업을 강화했을뿐만아니라 중공 송강성위의 위탁을 받고 조선족간부를 양성하고 조선족의 생산과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렸으며 조선족집거구역의 토지개혁운동도 지도했습니다.뿐만아니라 조선족들의 집거구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중국공산당에 받아들이고 당의 기층조직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조선족 출판, 문예사업도 지도했습니다. 그리고 3지대는 기관지신민일보 출간했습니다. 신문은 목단강의인민일보 더불어 중국내 정착한 조선인을 상대로 조선독립동맹의 주장과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적극 선전했습니다. 조선의용군 3지대는 항일련군이 조직한 기타 조선인 부대와 함께 북만지역 조선인을 보호하고 토비를 숙청하면서 정권건설에 기여를 했습니다.

이밖에도 제3지대는 갖은 곤난을 무릅쓰고 자기의 공업, 농업, 상업, 교통운수 등 생산기지를 건설해 식량을 자급하고 다른 부대를 지원함으로써 인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고 지방정부와의 관계를 밀접해 했으며 문예선전대를 조긱해 선전사업을 강화함으로써 인민군중을 단결해 생산을 복구발전시켰습니다.

1948 1, 동북민주련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됐는데 그해 3, 조선의용군3지대는 명령을 받고 할빈을 떠나 길림성 연통산일대에 가 길동경비사령부의 조선족부대와 목단강에서 온 조선족전사들로 무어진 목단강군구 14퇀과 함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로 재편성됐습니다. 그해 10, 3지대는 장춘포위전에 참가했는데 장춘이 해방된후 3지대는 장춘시 위수임무를 맡았습니다. 1949 3,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 후 3지대는 제4야전군 독립 164 491퇀에 편입돼 료심전역에 참가했습니다.

 조선의용군 3지대의 역사적 공헌에 대해서 연구가 깊은 전임 할빈시민족종교사무국 서명훈부국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향:  

<...조선의용군제3지대는 할빈해방, 할빈위수, 토비숙청, 토지개혁담보 등 면에서 불멸의 업적을 쌓았다. 비록 할빈에 있은 시간으 길지 않았지만 참 많은 일들을 하였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