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명은 1915, 조선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여났습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후 아버지를 따라 중국 길림성 화전으로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의 조선침략을 반대하는 반일민족독립운동에 참가하다가 후에 료녕성심양시교외 농촌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후 그는 남경, 상해 등지에 가서 항일활동에 참가했으며 그후 광주중산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용진학회>에 가입하고 맑스주의리론을 학습하기 시작했습니다. 1937 12월에 김택명은 중앙륙군군관학교 성자 강릉분교에 입학해 1938 5월에 졸업한후 10월에 국민혁명군 군위정치부 부부장으로 있던 주은래동지의 건의에 따라 건립된 <조선의용대>에 참가했습니다. 1938, 그는 무한에서 조선청년전위동맹 요원으로 활약하다가 이듬해 연안의 항일군정대학 5기를 졸업했습니다. 1940,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조선의용대로 다시 돌아온후 화북중조산에서 항일선전활동에 참가했으며 1941년에 락양에서 조선의용군제1지대 정치지도원을 담임했고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서 사업했습니다. 19427월에 그는 조선독립동맹에 참가한후 동북간부훈련반에서 훈련을 받은다음 그해말에 당조직과 조선독립동맹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와서 비밀리에 활동하게 됐는데 조직에서는 그에게 5가지 중요한 임무를 주었습니다.

첫째, 동북과 조선의 반일단체들을 찾아 이들과 화북 조선독립동맹간의 련계를 건립하는것; 그 다음, 진보적인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을 모아 혁명단체를 조직하며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는것; 세번째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련계해 사업을 전개하는 것; 네번째로, 동북의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고 동북지방의 조선청년들을 묶어세워 무장력량을 강화하는것; 다섯번째, 조직된 혁명단체나 항일부대가 없을 경우, 자체로 조선민족반일 통일전선을 결성해 조선민족의 힘을 키우는것이였습니다.

 1943 3월말경에 김택명은 농민으로 위장하고 3개의 자연툰으로 된 180여세대의 조선족주민들이 살고 있는 파언현 동성촌에 와서 불을 붙였습니다. 관내 태항산근거지를 떠나 동성촌을 온 그는 군중속에 심입해 중국항일전쟁의 형세, 중국공산당의 로선과 주장, 중국혁명과 조선혁명과의 관계, 중조인민의 단결의 중요성, 중국에서의 조선혁명자들의 영용한 투쟁모습, 그리고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투쟁과 발전에 대해서 널리 통속적으로 생동하게 이야기해 군중들의 반만항일열의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때 김택명은 진보적인 청년 조경형을 조선독립동맹의 맹원으로 받아들였고 1943 5 5일에는 원용주, 김용덕 10여명을 받아들여  조선독립동맹 12지부를 결성했으며 조경형을 지부서기로 임명했습니다. 파언현 당안관에 보존돼 있는 당시 12지부의 선전삐라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천백만의 생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전쟁을 일삼는 흉악한 마귀 일본제국주의는 지금 붕괴되여가고있다. 때는 왔다. 독사의 유린을 당하고있는 민족들은 같이 궐기하라! 광명은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고있다! 피압박민족은 단결하자! 제국주의를 철저히 타도하자! 중국은 중화민족의 중국이다! 조선민족해방 만세! 조선반일독립동맹 12지부

그후 김택명은 할빈 동과수의 반일활동가 정경호, 수화현의 김용진, 할빈의 현정민 등을 쟁취해 이해 10 6일에 할빈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설립했습니다. 설립대회가 있은후 이들은 각지에 파견돼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면서 우수한 조선청년들을 규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김택명은 그 동안의 사업상황을 북경시 서직문외 교장호동 12호에 설치한 중국공산당 북평지하련락소를 통해 조선독립동맹총부에 보고했습니다. 광복후 김택명은 리조린과 손잡고 조선독립대대, 할빈보안총대에 조선독립대대를 건립하게습니다.

194511 25, 빈현 배극도에서 열린 조선의용군제 3지대설립대회에서 김택명은 지대장으로 임명됐습니다.

1946 2 당시, 2000명에 달한 토비가 목란현성을 차지하고 주변 마을을 략탈하고있을 때 송강군구의 통일적인 포치에 따라 김택명 지대장이   3지대 2대대 2중대와 3대대를 인솔해 목란으로 통하는 길목을 통제하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거나 지원병이 오는것을 막는 임무를 수행했습니.

중공 흑룡강성위 당사연구실 원인산 연구원은 김택명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흑룡강성에서 항일투쟁을 진행하고 해방전쟁에 참가한 정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향:

<...19433월말경에 파언현 동성촌에 와 발을 붙였다. 수화, 유수 등 북만 여러곳에 다니면서 조선독립동맹조직을 발전시키고 맹원들의 사업 지도했다. 관내 테항산근거지를 떠나 동성촌으로 온 그는 군중속에 심입하여 중국항일전쟁의 형세, 중국공산당의 로선과 주장, 중국혁명과 조선혁명과의 관계, 중조인민의 단결의 중요성, 중국에서의 조선혁명자들의 영용한 투쟁모습 그리고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의 투쟁과 발전에 대하여 널리 통속적으로 생동하게 이야기해 군중들의 반만항일열의를 북돋아 주었다. 그리하여 재빨리 10명으로 구성된 <조선독립동맹 제12지부>를 1943년 5월5일에 건립하고 조경형을 지부서기로 임명했다. 수화, 유수, 상지 등 북만 여러곳에 다니면서 조선독립동맹조직을 발전시키고 맹원들의 사업을 구체적으로 지도했다. 그는 또 제12지부를 도와 여러가지 문건재료를 등사기로 찍어서 각 곳에 있는 맹원들에게 보내주어 세계 반파쑈전쟁과 중국항일전쟁의 유리한 정세를 선전하도록 했다. 1944년초에 조경형과 김명을 조선의 청진, 함흥, 흥남, 부산, 대구, 밀양 등 지방에 파견해 일본군대의 동태와 조선인민들의 사상정황, 생할형편을 료해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1943년겨울에 김대원을 관내의 연안에 보내여 자신의 사업정황을 <조선독립동맹총부>에  회보했으며 총부와의 련계를 갖게 됐는데 그후에는 열하성승덕에 있는 비밀련력소를 거쳐 총부와 자주 련계를 가졌다. 194410월에 김택명은 동성촌을 떠나 할빈도리구로 왔는데 그것은 한간들의 고발로 적의 파언현경무과엥서 그를 주시했기 때문이였다. 할빈에 온후 그는 여전히 조선독립동맹동맹제12지부를 통해 사업 지도했으며 삐라를 조선어와 한어 두가지 문자로 찍어서 파언, 수화, 상지, 할빈에 살포하고 무장투쟁의 과업을 구체적으로 지도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후 김택명은 8 20일에 조선독립동맹북만특별위원회를 건립하고 서기를 담임했다. 8 23일에 조선동맹특위는 할빈을 중심으로 조선족이 집거한 오상 등 현에 독립동맹지부와 건국청년회를 창건하는 한편 조선족청년들을 할빈에 집결해 무장대오를 건립할 준비를 했다. 9 25, 3백여명 조선족청년들로 구성된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건립하고 김택명이 대대장 겸 정치위원을 담임했는데 주요임무는 송강군구를 보위하는 것이였다. 1125, 빈현배극도에서 조선독립대대가 조선의용군제3지대로 재편성됐는데 지대장에 김택명이였다. 3지대 3대대는 김택명의 지휘밑에 형제부대와 배합해 목란, 통하, 방정, 상지 등 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에 참가한후 토비숙청전투에 참가했다.

1946 6,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지대장 김택명, 참모장 김연, 정치처 주임 리근산 등 3지대의 주요한 지도자들이 조선으로 갔다.>  

, 중공흑룡강성위 당사연구실 원인산연구원이 들려준 조선의용군제3지대 지대장이였던 김택명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