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창건90주년 특별기획보도“불후의 영렬” 편, 주덕해

 

 주덕해동지는 해방전쟁시기, 조선의용군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활약했었고 해방후, 중공 길림성 연변조선족지치주 1서기와 연변조선족자치주 1 주장을 담임했었다.

 

  지난 4 2일은 주덕해동지 탄신 백돐 기념일이였습니다. 이날, 길림성연변조선족자치주 주당위 회의대청에서 거행된 주덕해동지 탄신 백돐 기념좌담회에서는 주덕해동지의 일생은 당과 인민을 위해 끊임없이 분투한 일생이며 연변 여러 민족의 단결과 번영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한 일생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날, 연변주당위 등개서기는 연설에서 주덕해동지가 중화민족을 위해, 조선족자치주의 건립과 건설, 발전을 위해 세운 불멸의 공훈은 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며 새로운 연변을 건설해 나아가는데 거대한 정신적재부로 것이라고 높이 칭송했습니다.

주덕해동지의 본명은 오기섭이라고 합니다.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군 팔을면 복색동이였습니다. 1911 3 5, 로씨야 원동 연해주의 심산골에서 태여난 주덕해동지는 1920년에 어머니를 따라 중국 화룡현 용신사 수동골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초급소학교를 다닌후 농사일을 하면서 고려공산주의청년동맹에 가입하고 통신련락원으로 됐습니다.

1930년부터 1936 사이에 오기섭은 흑룡강성 녕안, 밀산, 벌리 일대를 누비면서 일본관동군 괴뢰들과 맞서 총림탄우속에서 청춘을 불살랐습니다. 이무렵 오기섭은 자신의 이름을 주덕해라고 개명했습니다. 그동안 간고한 투쟁의 선두에서 수시로 이름을 바꾸며 일제와 전전했던 그는 선후로 강도일, 김도순, 오동원, 오영일 등의 가명을 써왔었습니다.

항일전쟁시기, 주덕해동지가 흑룡강성에서 혁명활동과 항일활동을 정황에 대해서 중공흑룡강성위 당사연구실 원인산연구원은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음향:

<일본령사관에서 반일투사들을 체포했기에 조직의 지시에 따라 1930 2월에 흑룡강성녕안현으로 왔습니다. 그해에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으며 가을부터 중공녕안현위의 련락원으로 사업했습니다. 1931 2월에 그는 남호두에 파견돼 가서 남호두 구단위를 건립학 구단위서기를 담임했으며 그해 5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1932 1월에 그는 우가툰에 가서 특별단지부서기를 담임했습니다.

그해 9월에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밀산으로 갔으며 1933년초에 백포자구 이인반촌에 가서 촌당지부를 건립하고 지부서기를 담임했습니다. 그후 서대림자 당지부서기를 담임했으며 서대림자항일구국회를 세우고 회장으로 임명됐습니다.

1934년초에 주덕해는 회장신분으로 삼림대의 두령과 결의형제를 맺고 산림대를 쟁취해 항일하도록 했습니다.중공밀산현위에서는 주덕해동지를 중공백포자구위 위원, 현위조직위원으로 임명했습니다. 1934 12월에 그는 밀산북흥개골밀영에 가서 밀산항일유격대 후방기지의 책임자로 사업했습니다.그후주덕해동지는 후방기지에 남은 10여명을 인솔해 승자하자에 가서 김근이 령도하는 동북인민혁명군 2려단 류수처에 편입돼 려단류수처 당지부서기를 담임했습니다.>

1936 6, 주덕해는 벌리현위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로동방로동대학에 가서 학습했습니다. 모스크바부근의 체올나야라고 부르는 , 똘스또이의 장편소설안나 까레니나에도 나오는 이곳의 학교에서 주덕해는 조선반에 편입돼  1년반 동안 쏘련공산당사, 세계혁명운동사, 정치경제학, 사회발전사 그리고 군사학과목으로 유격전술과를 배웠습니다.

1939 3월에 모스크바를 떠나서 9월에 중국연안에 도착한 주덕해동지는 항일군정대학 간부훈련대 동북간부훈련반에서 학습한 후 팔로군 359 정찰련 지도원으로 사업했습니.

1943 조직에서는 주덕해에게 조선혁명군정학교의 설립준비사업에 참가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교사터로 연안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십리남짓 떨어진 라가평이라는 좁은 골짜기를 잡았는데 주덕해의 휘동하에 6개월동안의 고투끝에 17채의 18칸의 교사가 지어졌습니다.

1945 2 5, 조선혁명군정학교 개학식이 새로 지은 교사에서 열렸는데 중공중앙과 팔로군 사령부를 대표해 주덕총사령이 몸소 참석했습니다. 군정학교가 설립된후 주덕해는 학교당위 위원, 교무위원 총무처장직을 맡았고 연안군정학교는 조선의용군전사들의 배움의 전당으로 됐습니

해방전쟁시기, 주덕해동지는 흑룡강성에서  조선의용군제3지대 정치위원으로 활약했는데 시기 주덕해동지의 사업정황에 대해서 원인산연구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향:

<주덕해동지는 할빈시와 북만의 정치형세가 아주 복잡한 정황하에서 우선 부대의 정돈과 훈련, 그리고 정치사상사업으 단단히 틀어쥐고 부대의 전투력을 강화했다. 1946 4 28일에 할빈을 재차 해방할 주덕해동지는 3지대를 직접 지휘해 전투에 참가했다. 그때 송강성 공안총대 정치위원으로 있었던 초연파동지는 시기의 력사를 회억하면서 주덕해와 김택명이 거느리던 조선부대는 간고분투정신과 조직규률성이 강했고 전투력도 매우 강했다, 상급에서 주는 임무와 명령을 어김없이 집행했다고 말했다. …>

주덕해동지는 교육으로 민족부흥을 일으킬것을 호소하고 각지에 학교부터 세웠습니다. 어느곳에 가든 교육문제를 첫자리에 놓고 그곳의 교육형편부터 물었으며 학교운영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으로 1946년부터 1947 상반년까지, 북만 조선인들은 토지를 분여받았고 마을마다에 빠짐없이 소학교가 세워지게 됐습니.

한편 주덕해는 교육과 함께 언론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닫고 있었습니다. 3지대가 창건됐을 부대에서는 이미전투보》를 꾸렸으며 1948년에는 목단강조선민족동맹에서 발간하던인민신보》를 할빈으로 옮겨와《전투보》와 더불어 민주일보사를 세웠다. 민주일보》는 조선족 거주지역들에 널리 배포된면서 국내외 정세와 당의 방침, 정책들을 선전했으며 조선족 거주지구의 토지개혁운동, 공농업생산, 문화교육사업 정황을 적극 보도함으로써 조선족 거주지구의 사업들을 추진시켰습니다.

1948 4월에 주덕해동지는 동북행정위원회로 전근돼 민족사무처 처장을 담임했으며 그후에는 중공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서기,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서기,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 중공길림성위 상무위원, 길림성 부성장직을 담임했으며 중공제8기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으로 당선됐습니다.

주덕해동지는 새중국 조선인을 중국공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명료한 주장을 펼쳤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구 1기인민대표회의에서 주덕해동지는<연변조선족민족자치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부분이며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는 1급지방정권으로서 공동강령과 상급인민정부의 결의, 지시, 법령에 근거하고 민족구역자치실시요강의 규정에 따라 자치구내에서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사업을 진행한다>연변조선민족자치구 시정건설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습니다.

 수많은 풍상고초를 겪으면서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그리고 사회주의건설시기에 몸바쳐 싸웠고 사업했던 주덕해동지는 10년동란년대 4인무리의 박해를 받다가 가석하게도 1972 7 3일에 62세를 일기로 호북에서 서거했습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이자 초대주장을 지낸 주덕해동지는 200만명에 달하는 중국조선족들을 징표하는 얼굴입니다.

주덕해동지의 불멸의 혁명업적을 높이 칭송하려고 1986 7 3일에 길림성 연길시 인민공원 서산마루의 사철푸른 소나무숲속에 우뚝세운 <주덕해동지기념비> 세기와 더불어 길이 빛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