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병치료연구에 혼신을 하여 >

       

----전임 성눈병예방퇴치연구소 리준수소장에 대한 이야기

     

       일신천냥에 팔백냥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에게 있어서 쌍의 밝은 눈은 너무나 소중하므로 누구나 일생동안 좋은 시력이 있기를 원하죠. 올해 74 나는 전임 흑룡강성눈병예방퇴치연구소 리준수소장은 수많은 눈병환자들에게 광명을 안겨주기 위해 40여년간 혼신을 다해 일해 왔습니다.

1960, 열혈청년이였던 리준수씨는 할빈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흑룡강성눈병예방퇴치연구소에 받아 사업하게 됐습니다. 

대학시절 전공한 학과가  림상의학이다보니 안과학에 대한 치료연구는 령으로부터 시작해야했는데 당시 사업환경조건도 간고했고 살림집도 없어 단위에서 사무실에서 결혼한지 얼마 되는 안해와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본직사업을 착실히 보리라 속다짐했습니다.

음향:

<…그때 당조직이란 것을 알고 한번 보자고 맘먹었죠. 그때 안과학 박사인 석박사의 제자로 됐죠. 석박사의 지도하에 잘해 볼려고 업무를 숙달하는 한편 과외시간이나 공휴일이면 도서관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죠. 포부가 컸죠. ……>

음향: (부인의 )

<…이튿날 수술날이면 전날 저녁 책도 보고 준비를 깐지게 하죠. 그때 사업열정 대단했습니다. …>

음향:

<…그땐 공부해서 업무상에서 돌출하게 보자, 생각뿐이였죠. 그래서 안과서적들을 읽느라 아침 3-4시면 일어나서 평상시 매일 그랬죠, 저녁이면 12시전에 잠자리에 적이 없었어요. 도서관에 어찌나 다녔던지 도서관  관리원 아바이가 저를 보면 웃으며 자네 왔나 하고 말했죠. 원래 도서관 규정에 3-4권이상책 빌려주는데 가면 맘대로 고르라 하죠. 그래서 한아름씩 안고 와서는 볼만한거는 보고 필기할거는 필기하구 그렇게 공부했어요. >

부인의 음향:

<...서점에 영어책을 많이 사다 영어를 자습했죠. 외국서적을 많이 보니깐 점이 분의 우점으로 됐죠….>

    10년동란년대, 외국의학서적을 많이 봤던 리준수씨는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고 고생을 겪었습니다.

    음향:

<일어를 아니 일본특무라, 조선말 하니깐 조선특무라고, 영어를 아니 영국특무라구, 이불짐 지고 몇달 들어가 있었죠….집에도 오지 못하고 일년 이불짐지고 학습반에 들어가 있었어요. > 

하지만 외국어를 연찬하려는 끈질긴 학습열은 식을줄 몰랐습니다. 피타는 노력을 거쳐 그는 일어로 의학서적을 익숙히 번역할수 있고 사전에 의거해 영문, 프랑스문, 러시아문으로 의학전업서적들도 번역했습니다. 1963년부터 1966, 몇년사이에만 해도 그는 일어로 2백여편에 달한 어린이눈병치료에 관한 의학자료들을 번역했습니다.

1970 3, 리준수씨는 몽골족목축민들을 위해 눈병을 치료해 주려고 내몽골진바엘호기에 갔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은 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열심히 일상몽골어를 학습해 진료에서 끝내 몽골어로 목축민들과 대화할수 있었고 말타는 술을 장악해 분산돼 생활하고 있는 목축민들 집에 찾아다니며 병을 봐주군 했는데 낮이든 밤이든, 길이 아무리 멀어도 목축민들이 왕진해 달라고 하면 두말없이 인츰 길에 나섰습니다.

어느 하루, 3년동안 병환으로 침대에서 일어 못나고 있던 쓰친이란 몽골족여성이 그한테 병을 달라고 청들었는데 진단 결과 좌골신경통이였습니다. 질병의 시달림을 받은 쓰친은 생활에 대한 신심을 잃었는데 그때 리준수씨는 침구료법으로 그의 병을 치료해 주려고 매일 말을 타고 90 길을 달려 쓰친네 집에 침을 주군했습니다. 20차례의 치료를 거쳐 쓰친은 끝내 침대에서 일어나 걸어다니며 간단한 가무일을 할수 있게 됐습니다. 안해가 호전된 것을 보고 쓰친의 남편은 너무도 기뻐 만나는 사람마다 몽골어로 <안해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조선족의사- 쓰룬구쓰어무치>라고 자랑했습니다.

내몽골진바엘호기에 4달남짓  있으면서 그는 몽골족목축민들의 건강을 위해 왕진하면서 망망초원에 많은 발자욱을 남겼습니다.

1975년부터 1977년사이, 그는 나라에서 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의료봉사팀의 한개 분대 분대장으로 아프리카의 모리따니아이슬람공화국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의료봉사를 주었습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모리따니아에서 프랑스어를 하는 리준수씨는 언어교류상에서 막힘이 없어 모리따니아 인민들의 사랑과 환영을 받았습니다. 모리따니아에 2년동안 체류해 있으면서  그는 모리따니아인민들을 위해 침구와 침구마취치료법으로 눈병을 치료해 좋은 효과를 거뒀는데 어느 하루, 침구마취하에 백내장제거수술을 진행하는 것을 목격한 모리따니아위생부장은 <중국의 침구기술이 대단하다> 칭찬했습니다.

한번은 사시수술을 짧은 12분만에 깨끗이 주위 사람들의 탄복을 자아냈습니다. 모리따니아 당지의 신문과 방송사들에서는 리준수씨가 모리따니아인민들을 위해 봉사한 국제주의 정신과 높은 의료기술을 높이 칭찬했습니다.

리준수씨는 의료팀성원들을 거느리고 만주리에 눈병예방퇴치사업을 적도 있는데 두달남짓한 동안, 당지 의료사업을 위해 50여명 안과의무일군을 양성시켰으며 기층에 다니며 3천여명 환자를 치료해 주었고 수술차수는 2백여차 달했습니다.

당의 113중전회 이후, 과학연구의 봄날을 맞았다고 생각한 그는 안과눈병연구치료에서 보다 높은 차원의 돌파를 가져오려고 온갖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중국눈병예방치료위원회 위원으로 그는 만성결막염으로 불리우는-- 트라코마, 우리 성의 실명률을 낮추기 위해 그는 해마다 3달씩 의료봉사팀을 거느리고 무상치료를 주어60년대의 맹인률0.7% 80년대의 0.21% 하강시켰는데 그가 직접 수술해 환자만 해도 9천여명에 달했습니다.  그의 지도밑에 성눈병예방퇴치연구소에서는 우리 성의 50여개 , 현을 돌면서 180만명을 상대로 만성결막염인 트라코마질병에 대한 보편조사를 했고 백성들을 위해 트라코마질병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의 령도하에 흑룡강성눈병예방퇴치연구소는 10만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에게 실명의 고통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세계위생조직의 관원은 리준수씨와 그의 동료들은 WHO세계위생조직에서 수여한 임무를 출중히 완수했고 그들이 사업은 세계위생조직실명예방사업에서의 중국의 공백을 메웠다고 평가했습니다. 세계위생조직에서는 그의 사업경험을 일종 모식으로 삼고 3세계에 보급시켰습니다.

   이러한 찬사와 영예는 그가 자신의 심혈로 바꿔온 것이였습니다.

   선천성안구진동은 이전에 불치병으로 인정됐습니다. 1980, 리준수씨는 국내에서 남먼저 병에 대한 연구치료사업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는 국내외문헌을 많이 열독한 기초우에서 외국의 수술방식을 개진했습니다. 2백여명 환자들에 대해 수술한 결과 수술효과가 좋았고 이에 관한 그의 론문은 흑룡강성과학기술진보 3등상을 수여받았습니다.

리준수씨는 선천성안구진동의 유전방식에 대해 새로운 리론학설을 제기했는데 론문은 1989 전국눈유전학회 우수상을 수여받았습니다.

사람의 인생길에서 쌍의 밝은 눈은 더없이 소중한데 안과의사로서 리준수씨는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더우기 사시, 약시질병은 대부분 청소년시기에 발병하는데 적잖은 애들이 사시약시때문에 진학기회나 참군기회를 잃게 됩니다.

보편적인 조사를 통해 리준수씨는 어린이들 사시, 약시병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방면에서 참고할만할 전문저서가 없었습니다. 장기간 사시와 약시에 대한 치료사업과 연구사업에 몰두해 그는 연구사업을 하기 위해 외국어학습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국내외학술동태와 새로운 기술을 한층 장악한 그는 18년간의 심혈을 들여 맹상성교수와 함께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36만자에 달한 <사시약시학>이란 저서를 편찬해 국내 안과전문가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뿐만아니라 그가 사시약시학논문은 흑룡강성위생과학기술2등상을 수여받았으며 사시에 관한 그의 연구는 중화안과계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사시어린이들의 눈수술을 번마다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그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음향: <부인의 >

<안과수술에서 시간성과 정밀성을 요구하니깐 매일이다시피 손놀림동작을 익혔는데 집의 실타래를 많이 썼죠, 때론 수박을 놓고도 련습하군 했죠…>

수술치료와 시력회보훈련을 배합해 어린이들의 시력을 높여주려고 그는 자체로 기계 10여가지를 제작해 사시약시어린환자들을 훈련시키고 치료했습니다.

그가 사시약시를 치료한다는 말을 듣고 전국의 20여개 시의 수많은 어린이눈병환자들이 부모의 동반하에 천리길을 마다하고 성눈병예방치료연구소에 찾아 왔습니다. 학부모들의 경제부담을 줄이기 위해 리준수씨는 루장기, 고계영 의사를 거느리고 낮에 밤을 이어가면서 어린환자들을 위해 수술을 그들이 하루빨리 완쾌돼 귀로에 오를수 있게 했습니다.

치료받은 어린환자 학부모들이 그에게 고마운 성의를 표하려고 돈을 가져오면 그는 한사코 거절하군 했습니다.

음향:

<…환자들이 돈을 두고 가면 몽땅 연구소 당지부에 바치군 했는데 내가 이렇게 바친 돈이 적어도 몇만원은 됐죠….>    

해마다 6.1국제아동절과 양역설과 음력설이 되면 그는 성내외의 많은 환자들의 위문편지를 접했는데 성인으로 자라난 어린환자들이 참군했거나 대학교에 입학해 그한테 사진을 보내오거나 감사신을 보내오면 의사로서의 무한한 행복감에 잠겼고 삶의 보람을 느꼈습니다.

청소년 시력보호에 몰두해 오면서 리준수씨가 평생 사시약시 수술차수는 10만차례에 달했고 사시약시수술기술은 전국에서도 명망이 높았습니다. 

하여 과학기술진보상을 여러번 수여받은 그는 중국눈유전학회리사, 중국안굴절광학회 부주임 위원, 흑룡강성실명예방지도소조 부조장으로 활약했습니다.

흑룡강성우수전문가란 칭호를 수여받은 그는 의학전문가라면 오직 군중들속에 <뚫고> 들어가야만이 전문가칭호를 갖기에 손색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40여년간 그는 눈병환자들의 고통을 가셔주기 위해 하루와 같이 꾸준히 성실과 근면과 재질을 다하여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음향: (부인의 )

   <설명절때 당직서면 폭죽터쳐 눈이 상한 환자가 찾아오면 밤도와 쉬지 않고 치료해 주죠, 자기 병원에 찾아온 환자를 절대 다른 병원에 넘기지 않죠.> 

1989, 개혁개방의 붐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출국돈벌이를 갈망했습니다. 그해 리준수씨는 한국에 국제안과학술세미나에 참가하면서 한국안과협회 김재호주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가 중국안과계에서 명망높은 사시약시치료전문가라는 것을 김재호주임은 높은 로임을 줄테니 한국에 일하는것이 어떻겠는냐?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를 길러준 조국을 위해 계속 일하겠다며 김재호주임의 청을 사절했습니다.       

음향:

<…중국공산당이 나를 배양했는데 조국을 위해 봉사해야겠다고 말했죠. 당시, 월급 8천딸라씩 주겠다 했죠, 8천딸라라면 엄청 많은 돈이였죠, 내가 거절하니 사람 정말 소박한 사람이라구 말하며 그후부터 해마다 학술세미나에 초청해 주었죠.>

한국에 학술세미나에 참가할적마다 높은 로임, 별장, 승용차 우월한 조건으로 그를 <붙잡아두려> 사람이 있었지만 번마다 모두 그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수십년간 눈병예방치료에 종사해 오면서 리준수씨가 펼쳐낸 주요저서로는 <사시약시학>, <눈병>, <청소년시력보호>, <안과유전학>, <임상소아안과학>, <사시약시연구> 등이 있고 발표한 론문은 103편에 달합니다.

높은 의술과 청렴하고 성근한 의료봉사로 그는 선후로  흑룡강성로력모범, 중국소수민족우수과학기술자, 전국위생분야우수의무일군, 성우수전문가, 전국공헌돌출 우수전문가, 전국5.1로력모범, 전국5.1로력메달수상자, 중화의학대상수상자 많은 영예를 따안았습니다. 

   열혈청년으로부터 머리에 흰서리가 내린 노년에 이르러 정녕퇴임한 후에도 그는 여러해 동안 줄곧 전문가진료부에 다니며 환자들의 병을 주었고 젊은 의사들에게 의술을 가르쳐 주군 했습니다.

   오늘날,해남도 삼아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리준수씨는 걸어온 인생길을 돌이켜 보면서 눈병치료연구에 혼신을 자신의 삶에 아무런 후회도 없다고 말합니다.    

 

                     취재:  최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