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조선어방송국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기념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령, 중국공농홍군의 고급지휘관 양림, 항일녀투사 리추악 부부

양림과 리추악은 중국공산당 력사상 유명한 부부 항일렬사입니다. 양림은 중국공농홍군의 고급 지휘관이고 리추악은 유명한 항일녀영웅이였습니다.

양림은 원명이 김훈이며 1898년 조선 평안북도에서 출생했고 리추악은 원명이 김금주이며 1901년 조선 평안남도에서 태여났습니다. 이 두사람은 모두 1919년 서울 30만시민 반일대기의에 참가했는데 투쟁과정에서 깊은 감정이 이뤄져 혁명반려로 됐습니다.

조선반일혁명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면서 적들의 진압도 점점 강해지자 1920년 양림은 일본군경의 수색과 체포를 피해 중국 길림성에 망명했습니다. 고향을 떠나기전 그는 안해 리추악더러 조국에서 계속 투쟁을 견지하며 혁명의 수요에 따르되 개인의 감정때문에 조국해방의 책임을 버리지 말라고 고무격려했습니다. 양림이 떠난후 리추악은 또 조선경내에서 4년남짓이 반일투쟁을 견지하다가 1924년말에 조선을 떠나 중국 광주에 가서 양림과 함께 중국혁명활동에 참가했습니다.

그후 양림, 리추악 부부는 함께 제1차 동정에 참가했고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함께 당의 파견으로 쏘련에 가서 맑스레닌주의와 군사기술을 학습했습니다.

1930년봄에 귀국한 두사람은 당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국공산당만주성위기관에서 사업했으며 얼마후 중국공산당동만특위로 파견돼 사업했습니다. 그간 양림은 동만특위 군사위원회 서기직을 맡고 군사사업을 책임졌습니다.

그러다 1932년 양림은 강서 중앙중앙쏘베트구역으로 파견됐으며 선후로 중화쏘베트공화국 로동 및 전쟁위원회 참모장, 중국공농홍군학교 총교관, 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등 직무를 맡았으며 1934년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됐습니다. 같은 해 10월 장정에 참가한 양림은 선후로 군위간부퇀 참모장, 15군단 75사 참모장을 맡았으며1936 2월 황하를 강행도하해 대군도하를 위해 길을 개척하는 임무를 승리적으로 완수했습니다. 그해 2월 양림은 청간하구 상륙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장렬하게 희생됐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였습니다.

한편 양림이 중앙쏘베트지역으로 떠난 후 리추악은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중국공산당 주하중심현위에서 계속 사업했으며 선후로 현위 위원, 부녀부장, 철북구위서기 등 직무를 맡았습니다. 당시 리추악은 하동, 후림향, 흑룡궁, 우지미, 석두하자 등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일반백성들을 상대로 통속적인 언어로 군중들을 감화시켜 항일투쟁에 뛰여들도록 선전해 군중들 속에서 위망이 아주 높았는데 조일만과 마찬가지로 주하항일유격구의 유명한 항일녀영웅이였습니다.

1935년 만주성위와 주하중심현위의 지시에 따라 리추악은 또 철북혁명군중을 이끌고 방정, 연수 유격구를 개척했으며 중국공산당연방특지서기직을 맡았습니다. 1936 2, 당조직에서는 그를 통하현에 파견해 반일회조직을 건립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게 했습니다. 그의 지도하에 통하지역 항일운동이 신속한 발전을 가졌으며 적들의 불안을 일으켜 강력한 진압을 받았습니다.

그해 8월 적들은 항일련군 지하사업인원을 수색체포하는 과정에서 리추악을 체포했습니다. 리추악은 항일투쟁과 공산주의사업에 견정한 신념을 갖고 있었으며 적들의 각종 유혹에 추호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추악의 견정한 혁명의지에 실망한 적들은 체포한 7일만에 그를 살해했습니다. 그해 리추악은 35세였습니다.

, 동북렬사기념관 박춘희 부관장을 통해 양림, 리추악 혁명렬사부부의 감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음향)

양림과 리추악은 1925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국공산당력사상 조기 공산당원, 소수민족가운데서 아마 제일 먼저 가입한 부부로 할수 있다.

시기 주은래와 같이 1차동정에 참가. 엽정독립퇀에도 있었고 다시 황포군관학교 교원으로 들어갔다.

1927 4.12반혁명정면 발생. 중국공산당이 황포에서의 활동이 힘들게 되자 당조직은 그들 부부를 모스크바에 유학 보냄. 그만큼 양림과 리추악이 중국공산당의 관심, 배양을 받았음을 설명

그들이 쏘련에서 2 있었는데 머문 시간도 편이다.

돌아와서 마침 동북정세 긴장해지면서 동북에 만주성위 세워졌는데 군사지휘원이 필요했다. 하여 지역에 군사지휘관을 파견해달라는 만주성위의 건의를 받고 중국공산당중앙에서 양림을 동북으로 파견. 이렇게 두분이 동북으로 오게됐음

동북에 먼저 양림과 리추악이 같이 지금의 동만과 남만지역에 가서 그곳 조선사람들이 많은 그곳에서 농민운동, 반일활동 조직하는 동시에 항일무장력량을 조직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때 양림이 조선족 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리홍광과 같이 반석일대서 농민운동을 조직하고 반석로농의용군을 건리하는데 기여를 했다.

양림이라면 반석로농혁명군 초기의 창설자의 사람으로 .

양림 1933년쯤에 중앙쏘베트지역으로 파견됨에 두사람 혜여지게 됐다. 그후 리추악은 당시 주하지역 지금의 상지지역에서 부녀활동을 벌였다.

그간 리추악은 부녀위원, 철북지역 서기 직을 담임. 당지에서 항일구국운동을 벌였다. 아주 유명한 조일만 영웅과 같이 지역에서 이름을 떨친 그런 민족영웅이였다.

지금도 후림향, 흑룡궁 당시 그가 혁명활동을 하던 지역에서 리추악이라면 모르는 사람 없었다. 조상지가 활동하던 지역인데 3군을 도와 항일무장력량을 배송하거나 신발들을 만들어 보내고 약을 구해 보내고 농민운동, 특히 부녀들을 조직해 일을 하는데 공헌을 했다

후에 부부간에 대해 우리 당조직에서 관심을 돌렸다. 여기서 이야기할수 있는 것은 양림이 중앙쏘베트지역에서 지위 아주 상당했다.

장정시기 그사람의 지위가 중앙군 군위간부단 퇀장으로 있었다. 그의 군사재능도 아주 돌출했다. 여러차 전투에서 그의 재능이 아주 돌출해 모택동, 주은래의 중시를 받았다 .

당시 1934년쯤 만주성위 책임일군이 중앙쏘베트지역에 가서 회의 참가할때 모택동이 특히 찾아서 양림의 애인 리추악의 정황을 물어보면서 될수록 중앙쏘베트시역에 보내줬으면 좋겠다는 부탁도 했다. 그사람 돌아온후 만주성위에 얘기해 리추악을 중앙쏘베트지역으로 파견하려 했지만 당시 국민당의 토벌이 심해 교통상의 불편으로 성사되지 못하고 리추악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역시 공산당조직을 세우는 일을 했다

리추악의 문화수준 대단했다. 전렬관 전시된데서 리추악이 시는 곡까지 붙혀서 항일련군의 가요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데 <마지막 한방울 흘릴때까지> 한어문으로

쏘련류학까지 분인바  그의 문화소질, 조선족 부녀로서의 견강한 정신 아마 당지사람들에게 인상을 깊게 남겨줬다

후에는 연수, 방정 현위 세워진후 통하지역에 파견돼 역시 현위를 세우면서 중한 직책을 맡으면서 활동을 전개

가운데서 활동이 발랄히 진행되면서 당시 위만 당국의 지역에 대한 토벌이 심해지면서 이런 당조직 인원들에 대한 체포가 아주 심해졌다. 리추악이 백성집에 투숙했을때 적에게 발견돼 체포됐다.

적들도 대단한 인물을 체포했으니 그냥 놓히려 하지 않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될수록 저들을 위해 복무하도록 해썼다. 하지만 리추악은 태도가 아주 견결했다. “나의 신앙을 고치려고 그렇게 애쓰지 마라. 나는 이미 일제를 반대하는 길에서 절대 신앙을 고치지 않겠다”는 그런 견강한 태도를 보여 마지막에 통하에서 영용하게 희생

희생될때 19369

양림은 19362월에 희생. 황하강행도하는 전투에서 선봉대역할을 맡아 복부에 부상 피를 너무 많이 흘러 희생

 

양림은 항일혁명과정에서 정치사상사업이나 군사기술훈련분야에서 모두 뛰여난 재질을 과시했습니다. 그가 반석현위를 협조해 창설한 반석공농의용군은 후에 있은 남만유격대와 동북항일련군 제1군의 전신이였으며 양림은 이 무장대오 창시자중의 한사람이였습니다. 또한 황하 강행도하전투는 우리나라 군사작전사에서 적은 병력으로 강적을 이겨낸 아주 유명한 범례이며 양림은 바로 이 범례를 창조한 영웅이였습니다. 한편 리추악은 혁명서적을 열독하고 혁명리론을 학습하면서 강한 의지를 양성했고 중국혁명에 대한 굳센 의지와 신념을 키웠습니다. 적들에게 체포된 후 그는 적들 앞에서 중조인민이 강유력한 조직을 구축해 반일군을 함께 세우게 될것이라고 하면서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공산주의는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힘있게 말했습니다. 그의 이런 빛나는 혁명어구들은 지금도 적들이 남긴 서류에 기재돼 있습니다. 그는 또한 일반 여성혁명자와 달리 문화수준도 매우 높았습니다. 그가 지은 시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는 편곡돼 항일련군의 혁명노래로 널리 전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