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조선어방송국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기념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령, 북만주 항일부대 공동작전 지휘-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1930 5 1일 국제로동절를 맞아 만주 할빈 일본영사관 건물 주변에 로동자와 농민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수십명의 시위대는 영사관에 벽돌과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모조리 부쉈습니다. 일부 시위대는 영사관 안으로 들어가 내부의 기물을 박살내고 총영사 관저에도 침입했습니다. 조선에 이어 만주를 집어삼키려던 일본의 영사관을 습격한 사건은 당시 <조선일보> 1면에 보도됐으며 '할빈시지'에까지 오를 정도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에 북만주에서 활동한 뛰어난 항일무장투쟁 지도자가 대중들앞에 등장했는데 그가 바로 허형식입니다.

허형식의 원명은 허극이였습니다. 혁명에 참가한후 리희산, 리삼룡이라도고 불렀고 할빈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는 허극이란 본명을 썼습니다.

허형식은 1909년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허창일은 조선의 의병운동에 적극 참가해 싸우다가 일본제국주의의 피비린 진압을 피해 1917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흑룡강성 주하현으로 망명해왔습니다. 그후 살길을 찾아 여러곳으로 옮기다가 흑룡강성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했으며 1929년에는 할빈 황산저자(山咀子)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습니다.

황산저자에 이주해왔을때 허형식은 20세의 청년이였습니다. 이곳 농장은 할빈시의 자본가와 관리들이 결탁해 개설한 '혜제도전회사'인데 수전을 풀고 전문 조선족 농민들을 받아들여 참혹한 착취를 했습니다. 일제의 압박과 지주들의 착취에 계급각오가 높아진 허형식은 1930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지하당원으로서 반일,반봉건투쟁의 선봉으로 나섰습니다.

1930년초 중공 북만특위는 국제 '5.1'로동절을 계기로 할빈에서 '5.1'시위행진을 해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북만특위 위원인 리극화는 조선인청년들도 '5.1'시위에 참가하도록 포치했습니다.

이날 오후 조선인 청년들의 반일대오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는 기발을 들고 '돌격!', '부셔라!'소리와 함께 폭풍우가 쏟아지듯 돌멩이로 일본총령사관을 습격했습니다. 허형식은 용감히 앞장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시위대오는 인차 중국경찰에 포위돼 청년들은 적수공권으로 경찰들과 박투를 했으나 허형식을 비롯한 32명의 청년들이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체포된 후 허형식은 감방에서도 견결한 투쟁을 계속했습니다. 동지들과 같이 세차례의 단식투쟁을 견지했으며 대다수 동지들이 석방되게 하기 위해 허형식과 다른 7명이 주동적으로 이번 사건의 조직과 지도책임을 져 허형식, 서경락, 리욱 세사람은 8개월 징역을 판결받고 허형식은 심양감옥에 이송돼 1년 남짓한 감옥생활을 하다가 '9.18'사변후 석방됐습니다.

허형식은 빈현에 있을때 이미 결혼하고 딸까지 하나 있었으나 그는 가정생활과 개인의 안위를 전혀 돌보지 않고 안해와 딸애는 할빈 태평교에 있는 처가집에 보내고 혁명의 길에 나섰습니다.

그는 김책과 함께 빈현에 가서 당의 지하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해 반일동맹회와 공산주의청년단, 자위대 등의 항일투쟁 단체를 꾸렸으며 또 송화강 하류에서 부두 로동자로 일하며 반일회를 조직해 100여명의 회원을 모았습니다. 1933년에는 탕원현에서 반일회원 천여명을 모았고, 주하현 흑룡궁 일대에서는 반일선전,조직 활동을 폭넓게 벌여 반일유격대 창설에 튼튼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뛰어난 대중 조직 성과를 낸 허형식는 1935년 반일유격대와 국민당 계열의 의용군 등이 연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창설되자 2퇀 퇀장으로 취임해 군사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같은 해 10여개의 의용군지대와 연합해 연수현 류수하자의 일본군 거점과 주하에 있는 일본의 농장설비 등을 공격해 이름을 떨쳤습니다.

동북인민혁명군이 1936년 동북항일연군으로 발전할 때에도 그는 뛰여난 군사적 능력을 과시했습니다. 항일영웅 조상지가 인솔하는 항일련군 제3군이 일제의 토벌에 맞서 북만주 서북 방면의 새로운 유격투쟁 지역을 개척할 때 선발대장으로 임명된 허형식은 200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임무를 완수했고 이듬해에는 항일연군 3·5·6·9군 등의 징세 및 군수물자 배분문제 조율과 부대간 협동을 위해 만들어진 합동판사처 주임으로 취임했습니다. 동북인민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만주에서의 항일투쟁을 주도한 군사조직으로, 중국인과 조선인의 민족통일전선이라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전성기 때 규모가 만명이 넘은 항일연군은 일제의 만주 및 중국 침략에 커다란 장애로 됐으며 또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도 큰 위협으로 됐습니다.

항일련군 제3로군 연구 전문가인 흑룡강성 당사연구실 조준청 전임 부주임은허형식은 당시 북만주 항일투쟁 각 부대간의 총괄 조정과 공동작전을 연계시키는 매우 중요한 업무를 맡았다”며이때부터 그의 항일투쟁의 전성기가 전개됐다”고 말했습니다.

허형식은 19395월 북만주지역의 항일연군 3·11군을 통합해 출범한 3로군의 참모장 겸 3군 군장으로 취임하며 명실상부한 최고위급 지휘관으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 일제의 탄압도 극에 달했습니다. 1940년 일제는 관동군을 76만명으로 늘려 토벌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에 항일연군 1,2,3로군의 지도부와 잔여 병력들은 1941년까지 상당한 수가 쏘련경내로 이동했습니다.

동료들은 허형식에게 쏘련행을 설득했지만, 끝내 만주에 남아 고수할 것을 고집하며 무장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영하 3,40도의 혹한속에서 유격전을 주도하던 그는 1939부터 1940년사이 매우 어려운 시기에 눌하현성과 극산현성, 조원현성을 습격해 수비대를 사살하고 무기와 의복 등을 빼앗는 큰 성과를 이뤘습니다.

허형식은 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일생을 싸우다가 19428월 파언, 동흥 등지의 대중조직 점검을 나갔다가 일제토벌대에 포위돼 치렬한 격전에서 장렬하게 희생됐습니다. 그때 그는 겨우 33세였습니다.

, 그럼 허형식 렬사의 영웅사적을 동북렬사기념관 박춘희 부관장을 통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음향)

허형식은 동북항일련군의 군급이상 고급 장령, 조선족 항일영웅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허형식은 초기부터 일찍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이를테면 할빈에서 5.1운동때 할빈주재 일본령사관을 짓부시는 시위활동이 있었는데 그때 허형식도 이 활동에 참가했다. 그 일로 체포됐으며 9.18사변후 당조직의 구원을 받고 출옥된후 지금의 하동지역에 가서 항일유격대에 참가했다.

허형식은 후에 3군 즉 조상지의 부대에서 정치사업을 위주로 하다가 후에 제9군 정치부 주임으로 파견됐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허형식이 방정의 밀림속에서 군사훈련반을 꾸려 항일련군의 지휘원들을 배양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19394월이후에는 조상지를 대신해 3군 군장을 맡았고 후에 제3로군이 세워지면서 3로군의 총참모장으로 임명. 1940년좌우 동북항일련군이 적들의 토벌을 받게 되자 동북에서의 활동이 점점 힘들어져 대부분 쏘련경내로 전이. 허형식은 계속 동북지역에 남아 항일활동을 했다.

그때 아주 힘든 때여서 몇갈래 소부대만 남아서 일을 볼때였다. 당시 북만림시성위 서기는 김책, 허형식은 제3로군 총참모장. 이 두분이 남아서 북만지역의 항일운동을 계속 견지.

희생될때는 남아서 소부대활동을 검사하고 돌아갈때 지금의 경안에서 경위원 두명과 함께 삼림토벌하는 위만경찰에게 발견돼 두시간동안의 격전을 벌이다가 격전과정에서 희생

허형식의 권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당시 허형식이 희생된 후 그때 심림을 토벌하는 위만경찰대장(국장우)이 그 권총을 얻었다. 얻은후 일본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토벌에 공이 있다고 그 경찰에게 권총을 장려로 줬다. 1946년 해방전쟁시기 원 위만경찰로 있었던 국장우라는 이 경찰이 후에는 국민당 정진단의 단장으로 있으면서 역시 공산당반대하는 싸움에 나섰는데 1946년봄에 당시 허형식의 전우 우천방(후 흑룡강성 부성장으로 있었다. 역시 항일영웅, 고급장령) 이 동북련군을 지휘해 토비숙청 할때 국장우가 거느린 정진단을 소멸하게 됐다. 소멸후 이 권총을 로획했는데 그는 이 권총을 보고 이것이 자기 생전의 전우 허형식의 권총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후에 이 권총이 경안현에 보존돼 있다가 1948년 동북렬사기념관이 세워지고 1950년에 경안현 공안국에서 그 권총을 동북렬사기념관에 보내왔다. 그래서 우리가 이 소중한 권총을 전시실에서 볼수있게 됐다. 이 권총에 허형식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중요한 유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선족 항일영웅들의 지위로 보면 정치사상사업을 많이 했다.

그리고 문화수준이 대부분 높고 전투지휘가운데서 꼭 전우들과 단결협조하고 이 방면에서 아주 모범적인 역할을 했다.

 

만주 항일투쟁사에서 허형식처럼 항일 최전선에서 철저히 싸운 고급 지휘관은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허형식 렬사의 공훈을 길이길이 기념하기 위해 지금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 들머리에 허형식희생지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