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보도 "우리 신변의 자랑"---손영자 편입니다.


        할빈시 아성구 요전만족향 홍신촌이라면 성급 문명촌으로, 우리성 사회주의 새 농촌건설 시범촌으로 명성이 높은 조선족 촌입니다. 타민족들과 잡거하던 데로부터 순수한 조선족동네를 이루기까지, 성내 첫 벽돌기와집 보급 촌으로부터 성급문명촌으로 선정되기까지 홍신촌은 한번 또 한 번의 비약적인 변화를 이룩해 왔습니다.

        네, 손영자 지부서기의 소개로 홍신촌의 변천사를 알아보겠습니다.

        손: 전에는 한족들과 잡거해 있었습니다. 조선족으로서 풍속, 전통문화 등 여러 면으로 어울리기 어려운 점이 많았죠. 그래서 전경식 등과 분들이 독립적인 조선족 행정촌을 세우자고 제기하게 됐고 그래서 (지난세기)57년도에 홍신촌은 독립적인 행정촌을 세우게 됐습니다.

        단독 조선족동네를 형성하기는 70년대 초였습니다. 서순찬이란 분이 지부서기 직을 맡으면서 잡거촌이 아닌 순수한 우리 조선족동네를 세우자는 구호를 제기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79년부터 준비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조선족동네를 건설하기 위해 촌에서 많은 노력을 했었습니다. (건축자재를 해결하기 위해)벽돌공장을 세우고 운수에 필요한 트럭 등도 사들였습니다. 촌민들이 집을 짓는 것을 무조건 지지했습니다. 그래서 3년간의 시간을 들여 차츰 조선족동네 규모를 갖추게 됐고 82년에 지금 홍신촌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동네 건설을 위해 호도거리도 일년 미뤄 83년에야 실시하게 됐습니다.

        새 농촌 시범촌 건설을 하면서 변화가 큽니다. 길, 광장, 판공실이 새롭게 건설되고 녹화가 잘돼 촌민들이 도시생활 못잖은 생활을 누리고 있습니다. 집안 구조, 시설도 많이 개변됐습니다. 생활방식이 개변되니까 촌민들의 의식도 많이 개변됐지요. 또 우리 조선족은 해외로 도시로 나가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하는 것도 있고. 환경이 사람을 개조하고 사람 의식이 환경을 또 개조한다는 점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성급 문명촌은 84년도부터 선정됐습니다. 동네 기본 건설이 잘됐고 길, 환경미화 등으로 전부터 많이 강조해온 보람이었습니다. 또 97년도에도 동네 건설로 큰 공정을 벌렸습니다. 지금처럼 포종도로는 아니지만 5천6백미터에 달하는 길 옆의 배수로를 건설했고요. 성정부에서 성급 시범촌으로 선정한 것도 전부터 다져온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길을 건설하면서 시공대 분들이 할빈시 외곽도로 보다 더 토대가 좋다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에 걸쳐 해마다 도로를 다지고 수건해온 보람이었습니다.

        당과 정부의 혜택이 많습니다. 우리 홍신촌이 오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촌민들의 노력이 20%라면 당과 정부의 관심이 80%라고 생각합니다. 당의 민족정책이 너무나 고맙습니다...


        홍신촌이 타민족들과 잡거하던 데로부터 독립적인 행정촌, 단독 동네를 형성하기까지 당과 정부의 혜택이 많았다고 말하고 있는 손영자 지부서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동네건설에서 당원들의 솔선수범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손: 일이 있을 때마다 당원회의를 소집합니다. 2006년에 성정부에서 성급 시범촌으로 선정했을 때도 당원들이 능력은 없지만 시키기만 한다면 일할 힘은 있다고 적극 호응해 나섰습니다. 일을 결정할 때도 그렇고 일을 할 때도 그렇고 당원들의 역할이 큽니다. 또 촌지도부와 적극 협력하고 촌민들을 설복하고 일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당원들이 있기에 촌의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거죠. 당원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고 당원들의 지지를 떠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짧기는 하지만 홍신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손영자 지부서기의 기여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8세 어린 나이로 촌 사업에 참가해온 손영자 지부서기였습니다.

        손: 64년에 단지부 소조장을 맡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이가 18살이었습니다. 그러다 67년에 촌부녀주임직을 맡았습니다. 하긴 지금까지 촌에서 할 수 있다는 촌간부 직은 거의 다 맡았었습니다. 85년에 촌당지부 지부위원으로 됐고 94년부터 지부서기 직을 맡았습니다.

        당조직은 67년도에 가입했습니다. 능력은 없지만 또 전문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농촌에 발을 붙이고 뭐든 해보고 싶은 생각에서 촌의 사업에 참가한겁니다.

        사실 저는 전임 지부서기들의 사업성과를 물려받고 한 일이 있다면 관리해온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동네 거리 이름도 경순로 등과 같이 전임지부서기들의 이름을 땄습니다. 전임들이 동네 토대를 잘 딲아 놓은 보람이고 저는 정부의 지지로, 촌민들과 더불어 관리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18세 어린 나이로 촌사업에 참가하고 60대 중반인 오늘까지 촌의 사업으로 동분서주하는 손영자 지부서기지만 자신은 별로 한 일이 없고, 홍신촌에 성적이 있다면 그것은 전임 지부서기들의 공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신촌이 오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데는 손영자 지부서기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성급 시범촌 건설을 진행해온 최근 몇 년을 돌이켜봐도 동네건설을 위해 헌신해온 손영자 지부서기의 사업 자세를 읽을 수 있습니다.


        손: 할빈의 이주판공실에 곽씨라는 분이 있는데 하루는 누님한테 진짜로 감탄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왜 그러냐 했더니 신을 보라고 신이 다 떨어진 것도 모르고 뛰어다니지 않냐고 말해요. 그래서 봤더니 진짜로 신 밑창이 다 떨어져 나가 있었습니다. 내게 시간이 없다고 그분이 할빈에 있는 자기 아내에게 시켜 신을 사왔어요. 동네건설로 돌, 모래를 실어드리고 공사가 한창 진행되다보니 그해 신을 세 컬레 바꿨습니다. 하긴 많은 걸음을 걸었어요.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 동생네 집에서 해주는 밥을 먹고는 늦게까지 계속 달아 다녔습니다.

        한번은 사무실에서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마침 새 농촌건설 사업 지도차로 내려왔던 분들이 발견하고 병원에 실어갔죠. 그날부터 저는 점적주사를 맞으면서 판공실을 지켜야 했습니다. 별로 하는 일은 없지만 건축자재, 인력배비 등을 제가 책임지고 해야 했습니다.

        하도 걸어서 그런지 발목 힘줄이 살아나면서 걸으면 아팠습니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방도가 없었어요. 절룩거리면서 다니면 노친네가 분수없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보다는 촌민들의 정서에 영향 줄 것 같고 그래서 진통제 여덟알씩 먹으면서 견지했습니다. 지금까지 간혹 힘에 부치는 적은 있어도 촌사업으로 힘들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60대 중반에 들어선 나이라 상급 지도간부들로부터 "누님"으로, 혹은 "할머니지부서기"로 불리고 있는 손영자 지부서기입니다. 또 해외로, 도시로 진출한 자녀들로부터 "제발 일만 일이라 하지말고 몸을 돌보라"는 말을 시시각각 들어오는 손영자 지부서기입니다. 여느 동년배들은 자녀들을 따라 큰 도시에 들어가 아늑한 노후를 즐기고 노입협회에서 자신의 취미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정력을 촌사업에 돌려오는 손영자 지부서기입니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네, 손영자 지부서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손: 무슨 큰 포부가 있어서 그런게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해오는 일이고 하고 싶어서 해오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일해오면서 보람을 느끼고 내 보람으로 여러 사람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자신도 기쁘고, 무슨 사상경개가 높아서가 아닙니다. 변변찮은 능력이지만 자신의 실력으로 한번 농촌사업을 해보자는 그런 생각으로 시작해온 일을 결국은 지금까지 해오는 거지요. 우에서 많이 도와주고 얼마간 성적이 있으면 자신도 기분이 좋고 주위사람들이 좋아하는거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촌의 사업이 어쩌면 정신적 기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촌민들의 기쁨이 내 기쁨이고 촌의 사업이 정신적 기둥"이라고 말하는 그 한마디에서 우리는 농촌사업에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촌민들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손영자 지부서기, 노공산당원의 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네, 이상은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보도 "우리 신변의 자랑"---손영자 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