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창건 90주년 특별기획보도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중국공산당 영도아래 이룩한 찬란한 성과"란 표제로 동녕현 조선족사회 형성과 걸어온 발자취를 돌이켜 보겠습니다.


        동녕현에 거주하고 있는 김병섭 노인은 올해 86세 고령이지만 여느 노인들과 달리 안온한 노후를 즐기지 못하고 동녕현 조선족백년사 사료수집과 집필을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동녕현 조선족 역사기록을 후대에 남겨줘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 동력이었습니다.

        이런 사명감이 있었기에 그는 최근 몇 년간 대련 등지를 누비며 동녕현에 관한 기록을 찾고 현지답사, 인물탐방을 진행하며 이미 40만자 이상에 달하는 사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네, 김병섭 노인의 소개로 동녕현 조선족사회 형성과정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 동녕현 조선족 역사는 150년에 달합니다. 중국에서도 가장 오래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60년대 좌우부터 우리 조선족이 동녕현에 자리잡고 농사도 했지요. 고안촌이란 곳에 조선족이 22가구가 있었는데 그때는 삼차구도 아직 개발 안 된 시기였습니다. 소련(러시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조선-연해주를 거쳐 수분하강을 따라 이주해온 이주민이 위주였습니다. 포수, 인삼캐기, 금전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는 동녕현 현지와 일본인들의 자료에도 기록돼 있습니다.

        동녕현에는 1933년도에 일본인들이 진입했는데 군사시설이 구축되면서 청부업자로 조선인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38년 후에는 대거 입주했습니다. 그때 42개 부락에 조선족 3천여명이 분포돼 살았습니다. 수양, 동녕이 위주였습니다. 이때는 여관, 청부업, 임시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제1피 이민이었다면 제2피는 해방난 후에 호림, 밀산 등지에서 온 이주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때 토비들이 박해가 많아서, 알고 있겠지만 밀산 사건에서는 토비들이 한번에 조선족 3백여명을 살해했습니다.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하니 그 박해를 피해 피난온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조선이 해방되면서 귀국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목단강시는 반드시 경과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목단강시를 거쳐서 녕안, 도문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목단강시 거리에 조선족이 꽉 찾던 겁니다. 김일성 부대도 그때 목단강을 거쳐 지나갔는데 김광협이라고, 후에 조선국방부 부장을 했던 사람이 목단강군구 부사령원으로 있었습니다. 22세 젊은 나이었지요. 난민처리를 취해 목단강시 민주대동맹에서 6백가구를 조직해 동녕에 보냈는데 림송이란 사람이 직접 조직했습니다. 삼차구를 중심으로 해가지고. 이래서 삼차구가 완전히 조선족 집중지로 됐는데 목단강에서 보내온 6백가구와 자유이민을 온 7백가구를 합해 천여가구가 삼차구에 집중되게 됐습니다. 동녕현은 기후가 좋고 땅도 좋아 농사하기가 좋았지요.

        동녕현의 조선족사회 형성과정을 보면 자주적인 이주도 이주지만 공산당의 적극적인 영향도 있었습니다. 특히 해방초기에는 조선족 공산당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김: 항일하던 사람도 있고 또 45년 좌우로 입당한 사람도 있고 해 동녕현에 조선족이 귀농할 때 조선족 공산당원만도 20여명이 됐습니다. 1947년에 토개가 진행되면서 당위, 당지부가 나오고, 동녕현 제1임 당위서기도 우리 조선족이었습니다. 그때는 현이라 안하고 동녕구라고 했는데 동녕구 제1임 당위서기가 전봉래라고 조선족이었습니다. 항일투쟁에서도 조선족이 주도적 역할을 했습니다. 주거진이라고 있었는데 거기 선전부장도 조선족이었습니다. 잘했습니다. 신문도 내오고 조선족의 역할이 컸습니다. 우리 조선족들이 무장부대까지 있었어요. 전철산이라고 유격대를 조직하기도 하고...

        중국공산당의 영도가 있었기에 동녕현 조선족들은 해방 후 경제건설에서도 휘황찬란한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성과는 조선족당원들의 역할과 갈라놓을 수 없었습니다.

        김: 동녕현은 80%가 논인데 50년도 좌우로 우리 조선족이 바치는 징구량이 전 현 진구량의 60%를 점했습니다. 조선족이 큰 힘이 된 거지요. 또 김준희라고 48년부터 호조조를 설립했지요. 성급노동모범, 동북 훌륭한 선진 호조조 조장 칭호도 받은 사람인데 집단농장을 개척했지요. 성화시에서 첫 집단농장을 개척했다면 동녕현은 두 번째로 되는 집단농장을 개척했습니다. 그때 고급 호조조라는 것이 바로 지금 말하는 농장이었습니다. 또 최운봉이라 부현장으로 올라가고 윤석현이란 사람은 합작사를 설립해 전성노동모범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동녕현에서 우리 조선족이 앞장섰고 국가에 기여도 많이 했습니다. 70년대에 무당수확고가 이미 8백근에 달했거든요. 또 전성적으로 처음으로 모내기도 시작했고. 우리 조선족이 당의 사업에서도 성과가 큽니다.

        젊은 시절부터 동녕현에 거주해 오면서 동녕현 조선족사회 변화를 지켜봐 왔고 또 조선족백년사를 집필하면서 동녕현 조선족역사로 연구가 깊은 김병섭 노인은 동녕현의 조선족사회가 오늘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당과 정부의 민족정책 혜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김: 초갓집이 기와집으로 변하고 우차라 퉈라지(경운기)로 변하고, 또 생활상으로 봐도 우물을 먹던데로부터 상수도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다섯 식솔인 가정이 다 써우지(핸드폰)을 들고 다닌단 말입니다. 땐스(TV)도 한두개씩은 다 있고 60% 이상 가정이 냉장고를 갖추고 90% 이상 가정에 전화가 들어갔습니다. 전에는 술도 친구들이 와야 어쩌다 한잔씩 하는데 지금은 무져두고 먹습니다. 고기가 없으면 술도 안먹고. 동녕현 조선족들의 인구당 평균 수입이 만원을 초월하거든요. 생활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당의 민족정책이 잘 이행되고 있습니다. 한족동네도 다 그러하지만 동네마타 아스팔트길이 통하고 편벽한 산골동네에도 포장길이 통합니다. 다 민족정책의 덕이지요. 현 당위에서도 민족정책으로 잘합니다.

        네, 이상은 "중국공산당 영도아래 이룩한 찬란한 성과"란 표제로 알아본 동녕현 조선족사회 발자취였습니다. 잠시 후 계속해 방송 이어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