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창건 90주년 특별기획보도 "우리 신변의 본보기"--김상봉 편을 전해드리겠습니다.


        꼭 농사를 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꼭 시골동네에서 살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했고 교장사업을 하다 은퇴해 노후보장이 있고 자녀들이 해외로 나가 경제부담이 없으면서도 고향동네에 남아 고향건설에서 주추 역할을 하고 있는 노 공산당원, 그가 바로 상지시 일면파진 월성촌의 김상봉씨입니다.

        다년간 교육사업에 종사해오다 지난 2천년에 은퇴한 김상봉씨는 고향건설의 수요로 2002년부터 촌의 회계사업을 맡아오다 지난 2008년부터는 지부서기 직을 맡으면서 고향건설에 자신의 정력을 쏟고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도시로 나가 아파트생활을 하지 않고 향촌의 정취를 고집하며 고향동네를 떠나지 않는 김상봉씨입니다. 그럼 김상봉씨가 이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월성촌은 어떤 동네일까요?

        네, 김상봉씨의 소개를 들어보겠습니다.

        김: 1943년에 일본인들이 개척단을 파견할 목적으로 30채 집을 지었습니다. 후에 일본인 대신 위하, 야부리 등지로부터 조선 이주민들이 30호 들어오면서 동네를 형성했습니다. 전에는 월성촌이 아닌 인정툰으로 불렸습니다.

        전에는 (앞들이)전부 버들밭이었고 순 인력으로 한삽한삽 개간한 것입니다. 1953년까지 몇백 헥타르를 개간했습니다. 후에 58년도에 인민공사가 시작되면서 (인구가 적으니까)땅을 내놓았고 촌 이름도 월성으로 바꿨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민영기업이 발달했었습니다. 김정태란 분과 같은 사람들이 공장을 세우고 변압기, 뜨락또르 부품을 생산했죠. 당시 다른 동네는 분홍이 많아야 2원 했지만 여기는 훨씬 높았습니다. 부유한 동네였습니다. 또 다종경영을 하면서 인삼밭도 경영하고. 상지현에서는 성공적인 사례로 꼽혔습니다.

        3중전원회의 이후부터는 우리 촌 사람들이 찰떡이며 김치장사를 시작했지요. 우리 월성촌 사람들이 (산골에 살아도)시대 변화에 잘 적응했습니다. 그러다 80년대 말부터 한국에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는 전촌의 450명 가운데서 30명만 남았습니다. 농가수가 120여 가구 였는데 지금은 15가구 남았구요.

        지금 보면 간혹 병이 있어 한국에 나가지 못한 사람 내놓고는 대부분 다 한국에 갔다 왔습니다. 대부분 농사를 안합니다. 세호만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병이 있거나 늙은 사람만 남았으니까. 그래서 땅도 다 부치지 못하고 도급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촌민 노령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현 시점에서 어떻게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는가가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땅, 우리 이민들이 세운 동네 월성촌입니다. 부자동네로 자랑도 많았던 월성촌, 지금은 해외진출, 도시 진출 붐으로 어제날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노약자만 남았다는 동네, 겨우 30여명만 남았다는 동네, 이런 월성촌이지만 김상봉씨는 고향에 대한 식지않는 사랑으로 고향동네를 지키고 있습니다.

        김상봉씨가 이처럼 고향동네를 떠나지 않는데는 그로서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김: 내가 자란 곳이 농촌이고 부모 역시 다 농민이었습니다. 어머니도 원래는 상지거리에 살았는데 상지 어디를 돌아봐도 구강포가 최고로 살기 좋은 고장이다 해서 월성으로 들어오게 된 겁니다.

        60년에 교육사업에 참가해 73년에 당조직에 가입했습니다. 농촌의 당지부가 활약하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생산, 정치생활에서 당지부가 앞장섰지요. 김만복이라고 전에 지부서기였는데 욕심이 없고 희생정신이 많았습니다. 그 정신이 고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때 (동네로 들어오는)다리를 놓은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족마을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빈집이 많고 하지만 조만간에는 돌아온다고 생각합니다. 돌아올 때까지 동네를 지키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자란 농촌, 부모의 정이 깃든 농촌이기에 남다른 사랑을 갖게 된다는 김상봉씨입니다. 그러나 김상봉씨가 고향동네를 지켜선데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 공산당원의 사명감이었습니다. 선조들이 개척한 땅, 선조들이 세운 동네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민족사명감이었습니다.

        이런 민족의 사명감, 노 공산당원의 책임성이 있기에 김상봉씨는 동네건설에 힘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네, 김상봉씨가 지부서기 직을 맡으면서부터 월성촌의 변화를 알아보겠습니다.

        김: 우리 풍속, 우리 문화를 지키려면 동네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공동한 인식이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나가는 사람들이 많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 동네를 지키자는 것이 우리의 구호입니다.

        동네건설을 위해 인구당 천원씩 모금했는데 43만원 들어왔습니다. 이 돈으로 동네 길수리를 했지요. 성민위에서 15만원을 지원하고 우리돈 30여만원을 들여 동네 주요 길을 수건하고 동네로 들어오는 길을 포장했습니다. 전반 비용을 본다면 국가에서 60%를 책임지고 우리가 40%만 부담한 셈입니다. 국가의 혜택, 혜농정책의 덕을 본 셈이지요.

        건강한 생활에는 깨끗한 물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 우물을 팠습니다. 이 우물로 우리 촌민들의 부담이 없었습니다. 수리부문을 통해서, 국가의 음료수개조정책에 힘 입어 한푼도 안쓰고 수돗물을 들여왔습니다. 수질이 좋습니다. 개인집에 들어가는 관도는 매 호에서 5백원씩 부담했습니다. 그런데 그 돈마저 돌려준다고 하니 우리 촌민들이 진짜로 부담이 없는거죠. 빈 초가집 집터까지 관도를 묻었습니다. 들어와 집만 짓는다면 수돗물이 통합니다.

        그리고 지난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우리 동네가 조선족동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월성조선족촌이라고 특히 조선족을 밝혔습니다.

        이러한 것이 지난 3년간의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날로 가시화되는 촌민노령화문제와 향후의 발전방향은 김상봉씨가 늘 생각하는 문제였습니다. 한적한 동네 면모를 개변하고 동네 자원우세를 이용한 촌민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 김상봉씨는 지금 민속촌건설 등으로 자신의 구상을 익혀하고 있습니다.

        70고개를 넘어선 몸이지만 고향에 대한 남다른 사랑으로 고향땅을 지켜선 김상봉씨, 그의 몸에서 우리는 사명감으로 백성들을 위해 헌신하는 한 공산당원의 풍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네, 이상은 중국공산당창건 90주년 특별기획보도 "우리 신변의 자랑"--김상봉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