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영렬과 우리 신변의 본보기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 보도 --“불후의 영렬과 우리 신변의 본보기”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중국공산당은 90년 성상을 헤쳐오면서 신민주주의혁명을 령도하고 승리를 이룩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으며;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령도해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았으며;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전면 추진했습니다. 중화민족의 우수한 일원으로서 우리 조선민족은90년래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이 땅의 해방을 위하여, 새중국의 건설과 번영을 위하여 피와 땀을 아낌없이 바쳐왔는바 그가운데는 력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지도자들이 있는가하면 또한 우리의 신변에서 본보기를 보여준 훌륭한 공산당원도 있습니다.이에 흑룡강조선어방송국에서는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을 기념해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령과 우리 신변의 본보기”를 펼치게 됩니다.
중국공산당 창건90주년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렬”편에서는 가렬처절한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의 앞장에 서서 피와 목숨을 바쳐온 우리민족의 걸출한 지도자와 선렬들의 업적을 기리게 됩니다.
중국공산당 창건90주년 특별기획보도—“우리 신변의 본보기”편에서는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그리고 개혁개방과 초요사회 전면건설의 앞장에 서서 이 땅의 주인공으로서의 우리 민족의 립지를 굳치고 우리 민족의 영예를 떨치며 나라의 번영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본보기를 보여준 우리 신변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됩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애청과 성원 그리고 통신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동북항일련군 제7군 군장을 담임했 리학복 동지는 1901년 음력 12월 중국 길림성 연길현 삼차구에서 태여난 중국 조선족이며 본명은 리학만입니다.
연변에서 소년시절을 지내고 1915년에 흑룡강성 요하현으로 이사했습니다. 그 시기 요하지역에는 약 3분의 1이 조선족이였습니다. 9.18사변이후 요하일대에서의 혁명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였는데 그때 최용건동지가 이지역에 활동하면서 조선족 유격대를 조직했습니다.
리학복동지는 당시 요하현 반일회 회장을 담임하고 최용건동지의 활동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한어를 잘했던 리학복동지의 제의하에 당지의 고우산 구국군부대와 조선족유격대가 합병해 공동으로 항일하자기로하고 유격대는 구국군부대 특무영으로 편입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특무영에 들어가지 않고 특무영에 물자공급 등 후원지원 사업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고우산부대가 일본군에 밀려 쏘련으로 도망가면서 해체되였는데 구국군부대의 반목으로 조선족 유격대를 일본군에 넘기려는 눈치를 채고 탈리해 나와 다시 요하유격총대로 개칭하고 단독활동하다가 인민혁명군 제4군 4퇀으로 편입됐습니다.
한족지대에서 활동하려면 지방군중들과 관계가 좋은 사람이 퇀장이 되여야 했기에 리학복동지가 퇀장의 중임을 떠메고 최용건동지가 참모장, 당책임자였던 박진우동지가 부퇀장, 쏘련에서 유학하고 온 리두문동지가 정치부주임을 맡았습니다.
4퇀이 건립되후 단독으로 행동하면서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1935년도 추석을 맞이하면서 더 넓은 지역에서 유격대 활동을 하면서 일본군에 타격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하에 동안 일대로 원정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수리강 연안에 있는 조선족 마을 신흥동에서 하루 주숙하게되였습니다. 촌민들은 기장 찰떡을 만들어 유격대원들을 접대하고 있는데 기미를 챈 일본군의 백여명 토벌대가 진공해왔습니다. 한창 격렬하게 전투하고 있는데 뒷산으로부터 300명되는 위만군 부대가 건너와 앞뒤로 공격받게 되였습니다. 접전에서 다까끼 사령관을 위시한 20여명 일본군과 10명의 위만군을 사살했으며 4퇀은 저녁 어둠을 리용해 철수했습니다.
신흥동 전투에서 박진우, 리두문 등 16명의 투사들이 희생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실제로 유격대가 단독으로 일본군대와 맞서 싸운 첫 전투이고 큰 전투였기에 요하일대의 군중들이 조선족유격대야만이 진실로 항일하는 용감한 부대라는 평판을 받게 되였습니다. 그후 당지의 애국적인 한족 청년들도 용약 참군 했는데 40여명의 대오를 받아들여 력량을 확충했습니다. 게다가 전투 가운데서 총과 탄알도 많이 로획해 제4군 4퇀이 크게 발전하고 명성을 떨치게되였습니다.
1936년도에 항일련군 제7군을 건립하고 진영규동지가 군장을 담임했는데 부임해서 얼마 안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희생됐습니다. 진영귀동지가 희생된후 리학복동지가 제7군 군장을 담당하게 되였습니다. 당의 항일통일전선 정책에 따라 요하지역의 많은 작은 항일부대를 편입시켜 900명되는 부대로 발전했습니다. 당시 대원가운데 한족이 더 많은 부대로 발전하였는데 일부 한족가운데 편협한 감정도 있고 영도자리에 대부분 조선족이라는데서 불평도 많다는것을 눈치채고 리학복동지와 최용건동지 등 지도자들은 많은 한족 간부를 발탁시켜 각민족을 단합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리학복동지는 몸이 웅장한 고혈압체질인데가 장기간의 곤난한 생활환경속에서 풍습성 심장병을 얻게 되였습니다. 1938년도 할수 없이 쏘련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였는데 치료에 효험을 보지못하고 그해 8월8일 쏘련에서 37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현재 조선의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리학복동지의 동상을 세워 그의 항일업적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