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 보도 <우리 신변의 본보기> 오늘은 할빈시아성구아스하가 성건촌 진학봉 당지부서기의 이야기입니다.

50대 문턱에 갓 톺아 오른 진학봉씨는 아성시 나아가 할빈시에서도 꾀나 유명짜한 인물입니다. 90년대 후반기에 할빈시아성구아스하가 성건촌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입문하면서부터 오늘 촌 당지부서기로 이르기까지 그는 정부로부터 산더미같은 영예를 무더기로 끌어 안았습니다. <할빈시10대 우수 민족간부>, <아성시 선진공산당원>, <할빈시10대 로력모범>, <할빈시선진개인>,<할빈시인민대표>.,자기가 받아 안은 영예장을 하나하나 한참이나 읽어 보이는 진학봉씨는 스스로 걸어온 인생에 일종 영광과 보람을 느끼는 표정이였습니다. 그러나 이 수두룩한 영예와 간판뒤에 그를 진정으로 인간 사회로 올려 인지도를 높인것은 바로 경영인 그 자체입니다.

진학봉씨는 민족 촌 간부이기에 앞서 먼저는 기업 경영인입니다.

아성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한 진학봉씨는 졸업 그해로 성건촌에서 꾸리는 <성건기계용접공장>에 배치받아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설미가 좋아 인차 용접기술을 익숙하게 배워 낸 그는 1년 지나기 바쁘게 공장의 중견인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일솜씨도 좋지만 머리가 퍼그나 령활해 지배인도 생각지 못하던 창안도 내놓아 사람을 놀래이기도 했습니다. 다들 <공장관리와 운영>엔 싹수가 큰 사람이라고 혀를 내둘렀습니다.

1990년 초 드디여 중한 교류의 물고가 터지면서 진학봉씨도 난생 처음 한국의 출국길에 올랐습니다.남들은 약장사를 한다고 산더미처럼 보따리를 장만했지만 그만은 우리성 상지,아성 등지의 산에서 나는 고사리,취나물 같은 샘풀만 달랑 가지고 <고국방문>의 길에 올랐습니다.언제나 남다르게 생각하는 진학봉씨는 임시하는 약장사보다 장구한 프로젝트를 내와 국제장사를 해보자는 심산을 앞세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가 부산시의 한 한국상인과 협력관계를 맺고 개선가를 부르며 귀국했습니다.

         ----- 진학봉 음향 -----

(1990년대 한국나들이 할 기회에 한국인과 합작기업을 꾸리고 그때 이름은 할빈한성야채식품유한공사, 그때 성적이 좋을대 1년에 고사리 30만톤씩 수출했습니다.또 우리 고사리는 한국에 들어 갈적에 부산세관에서도 아주 이름이 있어 가지고 씨엔씨라고 하는 상자만 보아도 면제품 정도로 취급받고 취나물도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출한적이 있습니다. 취나물은 1년에 6,고사리는 평균,15톤내지 20톤 최고로 30톤까지 나갔습니다.년간 순수출액이 1년에 30만불 나왔습니다.)

 

지난세기 90년대 중반기에 들어 장춘제1자동차제조공장을 비롯한 자동차 관련 기업이 궐기하면서 동북삼성으로부터 자동차 부품생산의 하청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일떠섰습니다.

진학봉씨는 이 역시 돈벌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고 아성시에서는 선참으로 되는 자동차부품공장을 일떠세웠습니다.<한성>의 집단화를 고려해 우선 백만원을 투자해 <한성>의 계렬공장인 <흑룡강성한성자동차부품공사>를 출범했습니다.

 

-----진학봉 음향 -----

 

(1994년 흑룡강성한성자동차부품공사를 세웠죠,한 백만원 투자했지요,1년에 3백만원의 생산액을 올렷습니다.촌의 사람을 위주로 공인을 썼는데 정리실업자도 끌어 들여 그때 공인이 많을때는 130명을 헤아렸습니다.주로 자동차 탱크를 만들어 납품했는데 우리가 예약대로 기정 제품을 제때에 납품하고 품질이 좋아 장춘제1자동차 제조 공장으로부터 우수 배합공장으로 선정받고 최고품질의 공장으로 평의됐습니다.)

 

지난세기 90년대 상반기에 진학봉씨는 야채 수출을 위주로 하는 국제무역수출과 자동차부품공장을 병진시키며 실체의 량성순환을 이루고 수입에 수입을 거듭했습니다.80년대 <폭발호>들을 위주로 주먹구구의 아성시 유명 토배기 기업가들을 하나하나 밀어 제끼고 민족 기업의 최반렬에 오르기 시작했는데요,수백만원의 기업인도 손가락을 꼽을 그 시기에 진학봉씨는 벌써 천만원의 고지를 함락하며 부를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빛나는 <천만장자>의 신세를 누리며 진학봉씨는 결코 개혁개방의 은혜와 평시에 자기를 관심하고 도와 나선 주위사람들을 잊지 않았습니다.경제가 두터울수록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리념으로 당시 콤퓨터 사용이 바야흐로 사회적으로 보급되는 시점에서 자촌 농민들의 컴퓨터 정보화 시대를 열고 우리 민족 학생들의 혼란한 피씨방 게임 리용을 막기 위하고저 <아성한성 과학기술학교>를 꾸렸습니다.

 

          ----진학봉 음향 ----

 

(1996년 아성한성과학기술학교를 꾸렸는데 주로는 한국나들이 집에 있는 학생을 대상으로 586 컴퓨터 50대를 사들였습니다. 그때 저가 이 학교를 꾸린것은 돈벌이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회에 대한 환원,그리고 민족교육을 하자는데서입니다. 그때 이학교에 학생이 많을 때 근 150명이나 됐습니다.)

 

진학봉씨의 수입창출과 시회적 기부는 촌민들의 한결같은 환영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훌륭한 그의 이미지가 날따라 무르익어 가면서 그를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추대하자는 촌민들의 호성도 점차 커갔습니다.

 

         -----진학봉 ----

(1998년도에 성건촌 지도부가 흔들리면서 부분적인 령도는 한국으로 가고 그럴때였습니다.사원들의 추천과 요구는 고마우나 기업인으로 자란 저가 촌 간부사업을 한다는것이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촌에 조금이라도 보답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촌장을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촌장으로 올라와서 사무실도 차리고 농민합작사를 꾸리는 등 농촌 공동체를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여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성건촌은 흑룡강성 조선족 촌들 가운데서도 제2대촌으로 꼽히우고 있습니다.그러나 출국붐,연해도시 진출붐으로 로력 거의가 빠져 버리고 몇십명 안되는 로력과 로약자들만 남아 맡은바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개개인의 힘이 그렇게도 무력한 오늘날, 뭉쳐야 산다는 구호를 내걸고 취임후의 첫 거동으로 농민공동체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흑룡강성 조선족 마을치고는 제일 처음으로 농민합작사를 꾸려 종자장만으로부터 쌀판매에 이르기까지 한해 농사의 일식화를 농민합작사에서 실현해 합작사의 집체 력량을 최선으로 발휘하고 농민 개개인의 힘과,적극성을 한껏 자극시켰습니다. 상품화 시대에 농촌의 입쌀을 브랜드화 하는것이 급선무라 여기고 오리농 입쌀을 개발해 상품 등록을 하고 전성 나아가 전국에 홍보,보급했는데 지금은 <흑룡강성10대 록색 입쌀>로 선정돼 키로그람당 20원의 가격으로 전국각지에 널리 팔리고 있습니다. 경영 의식이 몸에 푹 베인 진학봉씨는 촌 운영도 기업식의 운영이 되여야 한다는 모식으로 촌발전을 떠밀고 있는데요, 모든것이 자금 반응과 반환이 빠르고 경제리익이 직접 촌민들에게 빨리 전달돼 일대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촌간부 부임 13년간 진학봉씨에게는 아름다운 꿈 하나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성건촌을 도시화 마을로 꾸려보자는 커다란 꿈입니다.

 

         ----진학봉 음향 ---

(신농촌 건설에 성건촌이 시내와 같이 있기에 시내화적인 동네를 꾸리는것이 저의 꿈입니다.그래서 올해 기업가를 초빙해 3억을 투자해서 성건촌에 아빠트 단지를 42만평방메터 규모로 조성하고 우리 땅 12만평을 내놓고 올해 12만 평방메터의 아빠트 건설을 끝내고 2년내에 42만평의 아빠트 건설을 전부 끝낼 생각입니다.)

 

성건촌의 부를 이끌어 온 진학봉씨는 성건촌의 밝은 전망에 신심이 충만돼 있습니다. 자기식의 기업식 촌 운영으로 성건촌의 미래는 더욱 아름다울것이라

진학봉씨는 믿어 마지 않습니다.

 

           ---진학봉 음향 ---

(지금 성건촌의 인구당 수입은 만2천원인데 5년내에 2만원 올리고 문화시설도 제일 고급적으로 할것이며 성건촌 로인조 구락부와 시설도 아성시에서 제일 좋게 할것입니다.그리고 지금 수전을 한전으로 개답해 비닐 하우스를 많이 건설할 터인데 지금 우리가 500동을 가져 있지만 년말내로 300동 더 늘여 우리 마을을 아성시에서 제일 커고 좋은 <남새 기지>로 건설할것입니다.)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 보도 <우리 신변의 본보기> 오늘은 할빈시 아성구 아스하가성건촌 진학봉 당지부서기의 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