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후의 영렬과 우리 신변의 본보기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 보도 --“불후의 영렬과 우리 신변의 본보기”
올해는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중국공산당은 90년 성상을 헤쳐오면서 신민주주의혁명을 령도하고 승리를 이룩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했으며;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령도해 커다란 성과를 이룩하고 풍부한 경험을 쌓았으며;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을 전면 추진했습니다. 중화민족의 우수한 일원으로서 우리 조선민족은90년래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이 땅의 해방을 위하여, 새중국의 건설과 번영을 위하여 피와 땀을 아낌없이 바쳐왔는바 그가운데는 력사에 길이 남을 걸출한 지도자들이 있는가하면 또한 우리의 신변에서 본보기를 보여준 훌륭한 공산당원도 있습니다.이에 흑룡강조선어방송국에서는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을 기념해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령과 우리 신변의 본보기”를 펼치게 됩니다.
중국공산당 창건90주년 특별기획보도-- ““불후의 영렬”편에서는 가렬처절한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의 앞장에 서서 피와 목숨을 바쳐온 우리민족의 걸출한 지도자와 선렬들의 업적을 기리게 됩니다.
중국공산당 창건90주년 특별기획보도—“우리 신변의 본보기”편에서는 사회주의혁명과 건설 그리고 개혁개방과 초요사회 전면건설의 앞장에 서서 이 땅의 주인공으로서의 우리 민족의 립지를 굳치고 우리 민족의 영예를 떨치며 나라의 번영과 민족의 발전을 위해서 본보기를 보여준 우리 신변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됩니다. 청취자 여러분의 애청과 성원 그리고 통신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중국공산당 창건 90주년 특별기획보도 <우리신변의 본보기> 오늘은 <중한 경제 교류의 교량>이런 제목으로 한국공간정보통신의 전 영업부장 박영락씨의 이야기입니다.
중국 하얼빈과 한국을 넘나들며 정부 차원의 굵직한 경제협력건을 묵묵히 성사시키는 흑룡강성의 <경제 공신>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출중한 무선전 기술로 한국공간정보통신에 초청,입사해 2010년도에 은퇴한 흑룡강성목란현 태생의 조선족 박영락씨입니다. 입사 난도가 하늘의 별따기라 일컫는 한국공간정보통신에 그것도 중국의 조선족으로 영업부장의 중직에 특별초청된 박영락씨는 근무기간 직무의 우세로 한국과 중국하얼빈을 잇는 유익한 경제활동을 벌려 보는것이 바람직하지 않는가고 생각해 봤습니다.그러던차 2006년 9월 왕리민 흑룡강성 부성장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한국에서 입수하고 갖은 노력을 거쳐 자기가 몸담그고 있는 한국공간정보통신의 방문을 이끌어 냈습니다.원래 한국방문일정에도 없는 한국공간정보통신을 뜻밖에 돌아본 왕리민 부성장은 공간정보통신의 중요성과 선진성을 새롭게 느끼는 뜻밖의 방문효과를 달성하면서 흑룡강성에도 이와 류사한 센타를 설립해야 하지 않는가고 제의했습니다. 왕리민 부성장의 견해를 인차 포착한 박영락씨는 이때로부터 흑룡강성의 정보센타출범을 위한 전투로정에 뛰여 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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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정말 말 그대로 동분서주할 정도로 바빴습니다. 량측간의 자료를 작성하고 또 서울과 할빈을 드나들며 량측의 방문상담을 조정,결정해야 했습니다. 여러모로 노력한 끝에 이듬해인 2007년 2월초에 한국공간정보통신사를 주축으로 기타 한국관련기업과 한국정부기관의 대표단 14명이 흑룡강성을 방문하고 흑룡강성 한중과학기술 협력정보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정보센타의 작용과 역할 등)
한중 정보센타의 설립을 발단으로 박영락씨의 중한경제협력 유치는 물고를 터치기 시작했습니다.한국 국제협력단의 중국흑룡강성 탄광재난 방지 시스템 원조사업,흑룡강성 상무청과 한국 정보화진흥원 한국도로공사와의 경제협력,흑룡강성 삼림공업총국 흑룡강성 삼림자원국과 한국삼림청 한국삼림과학연구원과의 경제협력건을 망라한 10여건의 중대한 경제협력건을 성공적으로 유치,시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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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경제협력건에 대한 간단한 해명)
올해 45세인 박영락씨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외표에 강인성을 내재한 외유내강의 사나이입니다. 40대 나이에 재난의 시대는 겪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일찍 조실한데다 궁핍한 경제난으로 어린 나이에 고생,고생을 거듭해야 했습니다.공부 할 돈을 마련하고저 논판의 비닐박막 쪼각을 줏어 팔고 길가에 떠돌아 다니는 헌신짝을 거두어 팔기도 했으며 부근 림장의 임시공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소년 무선전>잡지를 보고 호기심이 당겨 무선기술에 애호와 흥취를 느끼고 장차 자기의 리상을 무선전 공정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경제난으로 결국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자수성가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1983년 참군은 그에게 학습의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부대 복역 기간 광주,홍콩에서 합영하는 원격학원에서 함수교육을 받아 무선전 기술을 진일보 보강했으며 따라서 몇년 지나지 않아 부대에서 기술 권위로 소문을 떨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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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숙련해지자 부대를 위해 많은 일을 할수 있었습니다.영화영사기를 잘 수리해 부대의 긍정을 받고 정치처에 전근돼 영화기를 돌렸습니다.1986년 전국 영화기사 경기대회에서 2등상을 수상했습니다.
흑룡강성 무장경찰부대 통신기관에서도 기술이 우수해 여러 상장을 받았고 3등 공을 기입했으며 1988년 자원병으로 승진되고 1992년 우수한 인재 자원병으로 특별히 허가 받고 전문교육을 마친후 군대 간부가 됐습니다.감옥의 보초망대 경보시스템을 개발해 전국국대 과학기술 3등상을 수상했습니다.)
2002년 부대에서 제대한 박영락씨는 공무원 자리도 마다하고 단독으로 회사를 설립해 일찍 자기가 구상해오던 가정용 경보기를 개발해 판매했습니다.그가 무선 기술이 좋다는 소문이 항간에 퍼지면서 한국의 공간정보통신사에서도 소식을 듣고 높은 로임으로 그를 특별 초청했던 것입니다.2006년에 한국공간정보통신사에 입사해 2010년도에 이르기까지 짧은 4년간의 시간이였지만 박영락씨는 한국과 흑룡강성간의 경제협력에서 많은 굵직한 일들을 해놓았습니다. 한국과 흑룡강성간에 가교 역할을 놀면서 경제협력면에 큰 성과를 쌓은 박영락씨를 두고 흑룡강성 정부에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박영락씨는 오히려 담담한 표정입니다. 이젠 한국회사에선 은퇴했지만 40대의 혈기로 아직도 할일이 많다며 한국과의 인맥을 통해 정부를 위해 자기가 할일은 지금부터라고 담차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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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금 할일이 더 많은것 같습니다. 비록 한국회사에선 나온 몸이지만 아직 한창 할 나이가 아닙니까? 지금 할 일들이 태산같은것 같습니다.오는 5월엔 흑룡강성 건축협회 한국방문단을 이끌고 한국경기도를 돌면서 한국측 건축회사부문과 경제협력을 맺을것입니다. 벌써부터 흑룡강성의 여러 기관들로부터 한국과의 협력사업 부탁을 받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프로젝트들이 한,두건이 아닙니다. 참,한국회사에 있을땐 너무 몸이 매여 우리 조선족 사회를 관심해볼 여가가 없은것 같습니다.장차 한국과 특히 할빈 현지 조선족 기업체와의 경제협력에 신경을 써보고 실제적이고 묵직한 경제협력이 맺어지게끔 힘써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