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방아소리 가슴을 울린다

                       목단강 한경애

   
    쿵덕- 쿵덕- 그 정겨운 소리를 들었던지는 아득히 한세기는 되는상 싶다. 방아, 디딜방아, 기억의 갈피속에서 잊혀진지 까마득히 오래된 농기구이다. 지난 방학 한국 외암민속마을에서 우연히 옛날 우리 동네 동쪽에 안치했던 디딜방아와 똑같은 량다리디딜방아를 보았다. 그 디딜방아를 보니 마치 옛고향친구를 만난것처럼 반갑고 친숙하게 느껴졌다. 굵은 통나무로 만든 방아머리며 “인”자모양의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디딜다리며  나의 여리고 가는 다리로 찧었던 그 방아와 너무 흡사했다.
    여나문살때 엄마랑 언니랑 함께 방아를 찧었던 옛추억이 한폭의 은은한 수묵화처럼 내 눈 앞에 펼쳐진다. 흰머리수건을 두른 엄마는 방아머리 옆에 쭈크리고 앉아서 반들반들하게 깎은 방아전문용 나무막대기로 방아공이가 쳐들릴때마다 잽싸게 한번씩 휘젓고 공이가 내리칠즈음이면 벌써 손을 빼내기를 반복하면서 확안에 들어있는 싸라기를 휘젓는다.확안을 휘젓는 일은 보기는 간단하지만 잘못하면 공이에 손을 찧을수도 있기에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방아다리를 디디는 사람과 확안을 휘젓는 사람이 손이 잘 맞아야 방아를 잘 찧을수 있었다. 방아 다리를 디딜때에는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게 딛지 말고 알맞는 속도를 계속 유지해야 했다. 한참을 찧고나면 엄마는 괴밋대로 방아공이를 괴여놓고 박바가지로 찧어진 가루를 보드라운 동그란 체에 담아 큰 함지에 대고 흔들면 체 아래로 하아얀 쌀가루가 보실보실 소복이 내린다. 그리고는 아직 잘 찧어지지 않은 싸라기를 다시 확에 쏟아넣는다. 그러면 나와 언니는 또 온 힘을 다해  방아를 찧는다. 방아를 찧느라면 추운 겨울에도 어느새 이마에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수건을 쓴 머리에서 흰 김이 물물 피여올랐다. 한참을 찧고 나면 다리 기운이 다 빠져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하지만 힘들다고 하면 그만두라고 할가봐 말도 못하고 끝까지 악을 쓰고 버텼다. 아마도 한시라도 빨리 쌀떡을 해먹을 욕심에서 그랬었던것 같다. 다행히 다섯살이나 이상인 언니는 다리힘도 세서 내가 조금만 거들어도 방아는 쿵덕-쿵덕- 잘도 찧어졌다. 그 “쿵덕-쿵덕-” 방아소리는 들을수록 신명나고 아름다운 음악처럼 내 기분을 업그레이드 해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준비한 쌀반죽에 팥속을 넣으며 엄마한테서 송편 빚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송편을 이쁘게 빚어야 나중에 고운 자식 낳는대. 그러니 정성들여 잘 빚어야 한다…”
엄마의 말씀을 듣고 나는 정말 못난 자식이라도 낳을가봐 엄마가 빚는것을 골똘히 살펴보고는 열심히 송편을 빚었다. 반달모양으로 빚어 놓은 송편은 첫 솜씨 같지 않게 고운것 같았다. 여러번 빚어본 언니것보다 처음 빚은 내 송편이 더 곱다면서 엄마가 날 칭찬하셨다. 그 칭찬에 힘을 입어 더 열심히 빚었다. 네살 어린 녀동생도 송편을 빚는다고 법석을 떨며 끼여들지만 제대로 빚을수 없어서 엄마는 동그랗게 빚게한 다음 손바닥으로 꼭 눌러서 빈대떡을 만들어 장작 숯불에 구워먹게 했다. 아빠는 화로에 숯불을 담아서 석쇠를 놓고 떡을 노오랗게 구워주었다. 그러면 동생은 그걸 맛있게 먹었다.
   어른들한테서 들었던 대식품시대보다는 좀 나았지만 내가 어린 시절에도 식량이 부족해서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이여야 한두번 떡을 해먹을수 있었다. 팥을 삶아 넣은 고소하고 달콤한 송편과 김치속을 넣은 상큼한 송편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떡이였다. 그래서 떡방아를 찧는 일은 힘들지만 가장 신명나는 일이였다.
    어쩌다 하는 음식인것맡큼 좀 넉넉히 해서 앞집 금선,의찬이네집과 웃집 로씨할머니집, 아래집 춘녀네 집에도 한그릇씩 가져다주는걸 잊지 않았다. 떡 나르는 심부름은 언니와 나의 몫이였다. 옆집 할머니가 해다주었던 고추순대, 가지순대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안에서 스르르 군침이 돈다. 그리고 옆집 춘녀네 집에서 해다 주어 생일을 쇤것보다 맛있게 먹었던 돼지순대 기억도 너무 또렷하다.
     그 디딜방아는 우리 가족의 식량보탬도 한몫 톡톡히 하였다. 늘 건강이 안 좋으셨던 아버지여서 여섯식솔의 생계는 엄마 한사람의 여린 어깨에 고스란히 놓여졌었다. 벼가을을 하기 얼마전부터 우리 집 쌀독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서부터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돌피하러 다니셨다.한자루씩 돌피를 해서는 몇리길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오셨다. 하도 이고 다니는데 이력이 나셔서 마술쟁이처럼 손으로 잡지 않고고 늘 씽씽 다니셨다. 그리고 그 돌피를 방구석에 무져놓고 헌 이불을 덮어서 하루 이틀 두면 돌피이삭들이 노랗게 익어서 이삭이 부실부실 잘 떨어졌다. 잘 떨어지지 않는 돌피이삭은 손으로 알갱이를 훑어냈다. 그렇게 돌피를 타작해서는 뜨끈뜨끈한 방바닥에 얇게 펴서 하루 이틀 말려서는 아버지와 방아간에 가서 방아를 찧으셨다. 늘 새벽에 아버지와 방아를 찧으셔서 돌피방아를 찧은 기억은 없다. 하지만 돌피쌀을 한 날은 영낙없이 맨 돌피밥이였다. 조밥 비슷하기는 하지만 색갈이 더 옅고 조밥보다는 부드러웠다.하지만 돌피밥은 끈기가 없어 먹고 나서 얼마 안지나면 금방 배가 고팠다.하지만 엄마의 그 부지런한 손길이 있었기에 우리 여섯식구는 굶지 않고 살수 있었다.
    그외에도 고추가루를 내거나 김장마늘 찧거나 하는 일들은 모두 엄마혼자서 하셨다. 엄마가 고추가루를 빻고 온 아침은 코와 입을 막았던 하얀수건에 고추가루 한층이 발갛게 쌓이였다. 고추가루 방아를 찧을 때면 수시로 재채기도 하고 코물도 흘리면서 방아를 찧어야 했었다. 아침에 잠에서 깨여 보면 엄마는 벌써 방아간을 다녀오셨었다. 자식이 아까워 깨우지도 않고 혼자서 방아를 찧고 확안을 휘젓기를 하느라 오락가락했을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것 같았다. 왜 깨우지 않았냐 하는 언니의 말에 엄마는 “고추방아는 매워서 안돼. 너희들은 못해…”, “얼마 되지 않는데 너희들 깨워 뭘하니? 엄마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수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엄마가 빻은 그 고추가루는 엄마가 손수 담근 배추김치, 갓김치 영채김치 ,총각김치 양념으로 변신하
여 한겨울 우리 가족의 반찬으로 밥상에 올랐다. 또 엄마가 빻은 고추가루 한숱가락을 시라지 장국에 넣어 매워서 실실거리고 땀을 벌벌 흘리며 먹는 그 맛은 천하별미였다.
너무 가난하여 배부르게도 잘 먹지도 못했지만 부모, 형제와 함께 했던 깨알같이 작고 따뜻했던 수많은 소중한 추억들로 내 인생의 려정이 외롭지 않고 행복했던것 같다.
하지만 코리안드림으로 우리 현재의 조선족 가족들은 아직도 피할수 없는 아픈 리별을 십자가처럼 가슴에 달고 살아가야만 하는것이 현상황이다. “모두다 갔다.” 우리 조선족사회의 현상황을 너무나 잘 표현한 노래이다. 


 “안해도갔다
 남편도 갔다
삼촌도 갔다
모두다 갔다

한국에 갔다
일본에  갔다
미국에 갔다
로씨아로 갔다

잘살아 보겠다고 모두다 갔다.
눈물로 헤여져서 모두다 갔다.
산다는게 뭐이길래 산산이 부서져
그리움에 지쳐가며 살아야 하나
오붓하게게 모여살날 언제면 올가
손꼽아 기다려 본다네.


     많지도 않은 세식구도 모래알처럼 산산이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리별로 채워져 부모자식간에 떠올릴 추억도 없이 리별의 아픔만 안고 살아가야할 우리 아이들, 과연 물질의 풍요로움으로 그 잃음을 채워줄수 있을지 막연하다.
    몇년이 지났지만 우리 학생의 아빠가 눈물을 흘리며 하던 말씀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영실이가5살에 아빠가 한국으로 갔다가 6학년이 되여서 돌아왔는데 아빠가 따님이 이뻐서 머리를 쓰다듬거나 얼굴을 만지면 아빠를 째려보며 꼬집는다고 했다. 사춘기가 온 딸애는 자신의 친아빠를 동네 아저씨 취급을 했다. 그것이 가슴아파 혼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병 아가리가 고만큼 작은데 대야로 물을 붓는다고 어떻게 물이 다 들어갈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던 영실이 아빠의 모습이 지금도 그림처럼 생생하다. 올해 금방 한국으로 간 엄마가 보고 싶어 작문을 쓰다가 흐느껴 우는 학생을 보면서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 났다.한국 인천공항에서 늘 중국에서 한국에 있는 부모 만나러 간 아이들과 부모의 눈물로 얼룩진 리산가족의 상봉을 보게 된다. 사랑이 그립고 사랑에 목말라 늙은이의 희뿌연 텅 빈 눈망울을 하고 의기소침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이들, 자식이 네댓이여도 돌아올수 없는 마지막 길을 혼자서 외롭고 쓸쓸하게 가야만 하는 중국에 계시는 로인들… 너무나 가슴이 아픈 현실이다.
    농촌에서 방아를 찾아볼수 없듯이 비록 가난하기는 했지만 가족이 오손도손 모여사는,이웃이 정을 나누며 오순도순 살아가던 그런 따뜻하고 행복한 우리 조선족의 삶의 모습은 더는 찾아볼수 없다.
   오늘따라 쿵덕- 쿵덕- 그 정겨운 방아소리가 무척 그립다.
    쿵덕- 쿵덕- 그 정겨운 방아소리가 아련한 추억을 불러와 내 가슴을 따뜻이 덥혀준다.
    쿵덕- 쿵덕- 그 정겨운 방아소리가 파란만장했던 울 엄마에 대한 나의 효성을 깨워준다.
    쿵덕- 쿵덕-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그 정겨운 방아소리 메아리가 되여 가슴을 울린다.